우리 집에는 무서운 서랍장이 있다.

by 한 나강

우리 집에는 무서운 서랍장이 있다. 청소하다 힐끗 보기만 해도 고개부터 돌아가는, 말하자면 사람인 나를 졸아들게 만드는 몇 안 되는 물건들 중 하나랄까. 래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가구에 불과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형언하기 힘든 묵직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저런 것이 집안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께름칙해서 그 주변으로 결계라도 쳐놓은 듯 가까이 가거나 열어보는 일은 없었다.


세상의 어떤 것들은 차라리 손대지 않는 게 신상에 더 이로우니까. 나의 의식은 심지어 궁금해하지도 말라고 늘 경고하곤 했다. 달랑 세 개밖에 안 달린 서랍들 속에는 필시 감당하기 힘든 온갖 것들이 얽히고설켜 있을 터. 매번 못 본 척만 하다 어느 날엔 있었단 사실조차도 까먹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며, 무의식은 지난 수년간 그 서랍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날마다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좀 정리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눈 닫고 귀 닫아도 안 보고 안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속에 들끓는다. 죽이든 살리든 언젠가 활짝 열어 끄집어내야 할 잡동사니. 개중엔 당분간 살려두어야 할 요긴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숨통을 끊어 보내야 할 케케묵은 것들다. 조금 살아보니 세상엔 반드시 가져가야만 하는 것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 홀린 듯 그 방으로 향했다. 한 손에는 새로 뜯은 물티슈가 들려 있었다. 뭐 대단한 결심으로 몸을 일으킨 건 아니었고, 단지 낮에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처 없이 헤매다 문득 그 서랍장을 떠올리긴 했었다.

요즘 방주인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아서인지 키보드와 자격증 교재들, 책상의 나뭇결 사이에도 달달하고 쿰쿰한 맥주 냄새가 찌들어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닦아내면서 한두 번쯤 진짜로 저 서랍을 열 것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무심결에 열었다 부리나케 닫곤 했던 지난 기억들을 돌이켜보기도 했다. 서랍을 이미 열고나서나 개연성 없이 널브러진 물건들을 한 주먹씩 끄집어내면서도 똑같은 고민이 멈추지 않았다.


도로 집어넣을까.

아무도 모르는데.


피복이 벗겨진 충전선과 멀쩡한 충전선, 벌써 작년에 버렸어야 할 진통제, 용도를 알 수 없는 여러 연고들과 이상하게 생겨먹은 각종 테이프들, 길이도 모양도 제각각인 드라이버, 무릎보호대, 압정, 시커먼 탁구공, 손전등, 다 쓴 오초본드, 쓰다 남은 오초본드, 새 오초본드, 나 말고 둘 중 하나가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을 길고 짧은 뽀로로 연필들, 여기저기 산재한 깜찍한 스티커들, 안경케이스, 큰 손톱깎이 그리고 작은 손톱깎이 등등.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다 싶을 땐 확실히 버릴 것부터 추려내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먼지가 앉은 서랍 안을 깨끗이 닦은 뒤 버리고 남은 물건들을 알맞게 분류해 넣었다.

퇴근한 방주인은 말끔해진 서랍에 나름 개운한 기색을 비쳤다. 짙은 눈썹 위를 지근대던 무수한 생각들이 잠시나마 걷어진 표정이었다. 얼마 안 가 다시 포악스런 들에 밟히고 치일 게 뻔하지만, 적어도 얼마간은 쉬어갈 수 있겠다. 좀 더 널널해진 공간에서 두 다리 쭉 뻗고.


누구에게나 그런 서랍이 있다. 있다는 건 알지만 선뜻 열기가 겁나는 서랍. 마주칠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을 깔짝깔짝 긁어대는 성가신 소리. 털어낼 수 없는 먼지에 언제고 한 번은 터져 나오고 마는 재채기. 미처 해결하지 못한 서로 간의 불화나 오늘은 하지 않아도 될 수많은 걱정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일에 대한 불안과 분노, 때로는 내 것인 줄 알고 잔뜩 쟁여놓은 남의 생각들이나 적시적소에 쓰지도 못할 쓸데없는 지식들처럼. 꼭 한 번은 열어서 정리해야 할 자신만의 서랍장이 있다.


별것 아니지만 잠시나마 바랐다. 한동안은 그곳을 열 때마다 너와 나, 우리의 머릿속이 한결 가볍기를.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할 수 없는 것들을 기어이 손에 쥐려 말기를. 버릴 수 있을 만큼 한껏 내다 버리기를. 아마도 너보다는 내가 더 노력해야 할 일이겠지만. 아무튼 모두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