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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Jan 21. 2022

드라이브 마이 카

찢어질 듯 아파도, 상처를 직시하고 서로 포옹하며 살아나가야 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소통의 부재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고 앞으로 전진하자는 주제가 들어있다. 전작 <아사코>에서도 이 주제가 나타나지만, 아무래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에 대한 은유로 인해 소통의 부재로 인한 상처의 극복보다는 거대한 재난이 남긴 범국가적 상처를 극복하는 느낌이 더 강하게 온다. 그러한 이유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드라이브 마이 카>는 <아사코>보다 강렬하게 상처와 극복을 다루는 영화다. 세상에 완벽한 소통이란 없다. 따라서 타인에 의해 상처 받고 타인을 대하는 나의 모습에서 한 번 더 상처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러한 상처와 이로 인한 고통을 직시하고, 껴안으라고 말한다. 마음속 응어리들을 토해 낼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소통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는 소통이 상처의 원인이 된다. <아사코>에서 주인공 아사코가 상처 받게 되는 계기는 그녀의 전 남자 친구 바쿠가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즉 소통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주인공 가후쿠가 상처받게 되는 계기는 자신을 사랑하는 듯하면서도 외도를 저지르던 아내를 목격하며 의도적으로 방황하다 결국 아내와의 소통을 놓쳐버리며 그녀를 영영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주인공 미사키 역시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할 때가 있으면서도 결국엔 학대해 버리는 어머니와의 소통을 회피하다 산사태가 일어난 날 어머니를 의도적으로 구하지 않으며 스스로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처럼 하마구치 류스케는 자신의 작품에서 소통의 부재와 아픔의 외면을 통해 주인공들에게 강렬한 상처를 준다.


그러나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상처를 회복하는 계기 역시 소통이다. <아사코>에서 아사코가 자신의 상처를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는 다시 만난 바쿠와의 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이후 아사코는 오사카로 가 료헤이와 소통하며 굳게 닫힌 그의 마음을 다시 열고자 노력하고, 불확실한 미래라도 료헤이와 함께 살아가고자 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두 주인공 역시 소통을 통해 상처를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딱딱한 관계에 머물러 있던 가후쿠와 미사키는 소통을 통해 서서히 서로에 대한 마음을 열어간다. 이렇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소통은 이윽고 서로의 상처를 공유시키고, 하나로 만든다. 자신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던 사건들을 털어놓으며 상처들과 마주하고, 고통을 끌어안는다.


이때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사용됐던 배우가 정면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도록 하는 연출이 인상적이다. 하마구치 감독은 이 연출법을 인물이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상황에서 사용하는데, 그의 영화에서 이러한 상황이 상처 회복의 첫 단계로 작용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연출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 외에도 차내 흡연을 철저히 금지하던 가후쿠가 끝내 흡연을 허용하고 자동차의 윗뚜껑을 열어 미사키가 함께 담배 연기를 흩날려 보내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면서 하나가 되었음과, 아내에 대한 가후쿠의 죄책감이 어느 정도 덜어졌음을 훌륭히 묘사했기 때문이다.


연기와 언어

이 영화에서 소통이 상처를 회복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연기와 언어는 소통을 이루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정확히 말하면 연기가 소통의 직접적 수단이고, 언어는 그 연기를 뒷받침한다. 작중에서 가후쿠는 대본 리딩을 할 때 배우에게 느리고 무미건조하면서도 정확한 발음을 낼 것을 주문한다. 이 연기 지도법은 실제로 하마구치 감독이 연기 지도를 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사실과 '상대의 언어를 몰라 감정 전달이 안 되니 대사를 외워 이를 큐사인으로 이용하는 것'이라는 대만인 배우 재니스 창의 대사를 함께 곱씹어 보면, 가후쿠의 독특한 연기 지도 방식의 이유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상대와 합을 맞춰보기 전 나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여 연기가 시작됐을 때 배우가 인물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보면, 작중의 연기 지도 장면들이 메타적이라는 사실도 쉽게 캐치할 수 있다. 이 장면들을 통해 감독은 자신의 연기 철학을 작품 내에 드러냄과 동시에, 나를 받아들인 후 상대와의 관계를 구축하여 소통한다는 영화의 주제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동일하니 후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야외 연습 장면에서 대만인 배우 재니스 창과 언어장애를 가진 한국인 배우 이유나는 각각 중국어와 한국 수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이들은 서로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연습에서 훌륭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며 멋진 연기를 펼친다. 가후쿠는 이들을 향해 "저 둘 사이에서 무언가 일어났다"라고 말한다. 가후쿠는 이 이상으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나는 이 '무언가'가 서로에 대한 공감이라고 보았다.


서로의 언어를 모름에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공감하는 연기를 해낸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언어란 말 그대로 연기를 위한 도구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모국어가 아닌 언어는 별도의 교육 없인 말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고 있어도 눈빛, 떨리는 숨결, 표정 등으로 그 안에 서려있는 감정들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재니스와 유나는 각자의 언어로 연기한다. 여기서 언어는 철저히 각본 속 대사를 내뱉는 도구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연기를 통해 나, 그리고 상대를 이해하는 공감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으며 멋진 연기를 해낸다.


직시와 공감, 그리고 회복

가후쿠와 미사키 역시 같은 방법으로 하나가 된다. 가후쿠는 다카츠키로부터 자신은 듣지 못한 아내가 해 준 이야기의 후속편을 들으며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아내의 외도와 죽음을 직시한다. 그전에 가후쿠는 다카츠키에게 아내가 자신과 성관계를 맺으며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 자신들의 딸이 요절했을 때부터라고 말한다. 거기에 살아있으면 23살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이에 미사키가 반응한다. 가후쿠가 차 안에서 무엇을 하든 반응하지 않던 미사키가 반응한 이유는 자신 역시 23살이었기 때문이다. 다카츠키가 떠난 후, 미사키는 그의 말이 거짓말 같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동시에 가후쿠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고, 어머니의 학대와 죽음을 직시한다. 가후쿠는 자신이 어머니를 죽인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 공감한다. 나도 아내를 죽인 것이라면서.


이 시점에서 가후쿠와 미사키의 관계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도 해석될 요지가 있다고 본다. 우선 미사키가 자신이 가후쿠의 딸과 동갑이라는 사실에 반응했다는 점, 그 직후 가후쿠는 뒷자리가 아닌 미사키 옆의 조수석에 앉고, 차내 흡연을 허용하며, 맞담배를 피운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시퀀스를 기점으로 소통을 통해 점점 거리를 좁혀가던 가후쿠와 미사키는 서로의 상처와 아픔에 대해 공감하면서 끝내 서로를 치유해주는 단계에 들어선다. 다카츠키가 경찰에 잡혀가고 가후쿠가 바냐를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가후쿠는 이를 거절한다. 자신과 아내의 관계와 유사해 보이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주인공을 더 이상 연기하기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바냐를 연기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연극제가 취소될 상황이기 때문에 가후쿠는 고뇌하기 시작한다.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그녀의 고향인 홋카이도로 향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과정에서 가후쿠는 많은 것들을 본다. 자신의 부탁에 망설임 없이 자신의 아픔이 봉인된 곳으로 향하는 미사키를 보고, 홋카이도로 향하는 배 안에서 사람을 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여 지금의 고뇌를 초래한 다카츠키의 뉴스도 본다. 그렇게 가후쿠는 미사키와 함께 산사태로 무너진 그녀의 집에 도착한다. 미사키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상처를 직시한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이중인격, 그 인격에 위로받았던 자신, 끝내 그 인격과 어머니를 동시에 죽여버린 자신까지. 끝내 미사키는 땅에 담배를 꽂아 어머니를 추모한다. 자신의 상처도 담배 연기처럼 날려 보낸다. 가후쿠는 그런 미사키의 더러워진 손을 잡고, 자신의 양팔로 그녀를 껴안는다. 가후쿠는 미사키를 공감한다. 미사키도 가후쿠를 공감한다. 재니스와 유나처럼, 그리고 아버지와 딸처럼.


이 장면은 감독의 전작 <아사코>와도 통하는 구석이 있다. <아사코>의 엔딩에서 료헤이는 비가 와서 불어난 강을 보면서 '더러운 강'이라고 말한다. 아사코는 이에 그럼에도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 엔딩을 통해 아사코와 료헤이의 앞날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것임이 암시된다. 이러한 면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가 미사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아사코>와 닮았다. 동시에 <드라이브 마이 카>의 엔딩은 열린 결말로 끝난 <아사코>의 결말을 닫아준다. <아사코>가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는 결말로 아사코와 료헤이의 앞날을 암시할 뿐이라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를 이어 공감의 포옹을 통해 가후쿠와 미사키가 아픔을 또렷이 직시하면서 살아나가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끝내 아픔을 직시하며 살아가기로 한 두 사람은 상처를 회복해 나가기 시작한다. 가후쿠는 트라우마로 기피하고 있던 바냐 역을 맡고, 소냐 역을 맡은 유나의 수화를 끝까지 직시하며 눈물을 흘린다. 미사키는 산사태로 집이 무너지며 얻은 흉터를 치료하고, 개 한 마리와 함께(작중에서 미사키는 개를 귀여워한다) 가후쿠의 미련과도 같았던 자동차를 몰며 도로를 달린다. 아내와 어머니로부터 기인된 가후쿠와 미사키의 상처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계속해서 직시하고 있다. 상처가 삶을, 앞으로의 길을 잡아먹지 않도록. 끝내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재니스와 유나처럼 서로를 포옹하며, 바냐와 소냐처럼 휴식을 믿으며 조용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어떡하겠어요. 살아야죠! 바냐 외삼촌, 우리 살도록 해요. 길고도 숱한 낮과 기나긴 밤들을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참을성 있게 견디도록 해요. 휴식이란 걸 모른 채 지금도 늙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러다가 우리의 시간이 오면 공손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내세에서 말하도록 해요. 우리가 얼마나 괴로웠고, 얼마나 울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슬펐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릴 가엾게 여기실 테고, 저와 외삼촌, 사랑하는 외삼촌은 밝고 아름다우며 우아한 삶을 보고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지금 우리의 불행을 감동과 미소로 뒤돌아보면서 우린 쉬게 될 거예요. 전 믿어요, 외삼촌. 뜨겁고 열렬하게 믿어요…… 우린 쉬게 될 거예요!


- 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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