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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Jan 21. 2022

반딧불이의 묘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는 어떻게 일본을 망쳤나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은 선전포고 없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위치한 미 해군 기지를 공습하며 유럽 전선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의 거대 전선 중 하나였던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대동아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번영하는 권역(大東亞共榮圈)'을 차지한다는 허무맹랑한 꿈으로 시작된 끔찍한 전쟁은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종전선언을 담은 옥음방송이 일본 제국 전역에 울려 퍼지며 끝이 났다. 故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영화 <반딧불이의 묘>는 이처럼 평범한 일상조차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던 대혼란의 태평양 전쟁기를 배경으로, 필사적으로 일상을 유지하고자 했던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두고 '뛰어난 반전(反戰) 영화'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이에 故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반전 작품 같은 게 아니다. 그런 메시지는 일절 실려있지 않다.”라는 말로 그 수식어를 부정하면서도, "반전 애니메이션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러한 감독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주인공 세이타와 세츠코는 전쟁으로 인해 소중한 것들을 잃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이 죽음을 맞는 비극으로 영화가 끝나기 때문이다. 즉, 나 역시 이 영화를 전쟁으로 인해 비극을 맞는 사람들을 조명하면서 전쟁의 끔찍함을 알리는 반전 영화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반전 영화임을 부정하는 타카하타 감독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오랫동안 작품의 진짜 메시지에 대해 고민해 보며 감독의 인터뷰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상황 등의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했고,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이 영화는 반전 영화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故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영화 <반딧불이의 묘>는 반전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메시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주원인이었던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 및 이를 뒷받침한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과 이러한 자국의 폭주를 막지 않는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당시의 대중들에 대한 비판이다.


작중에서 주인공 세이타는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어머니와 집을 잃게 되자 여동생 세츠코와 함께 남은 돈, 식량을 갖고 어머니가 미리 살림을 옮겨두었던 숙모 댁으로 피난을 간다. 하지만 숙모는 세이타와 세츠코를 좋게 보지 않는다. 밤마다 우는 세츠코를 보고 화를 내거나 세츠코에게 세이타 몰래 어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근로 동원이나 소방 활동에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놀고먹기만 하는 세이타를 구박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구박을 받게 된 것에는 세이타의 잘못도 존재한다. 그러나 숙모의 구박으로 인해 세이타와 세츠코가 숙모를 떠나 새 살림을 차렸고, 끝내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다는 것에서 숙모의 잘못은 간접적으로라도 존재한다.


이러한 숙모의 잘못은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잘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타카하타 감독은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 '아니메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시의 일본은 최악의 전체주의가 옳다고 받아들여진 시대였다. 이 이야기는 두 남매가 전체주의에 저항하고 순수한 가정을 만들고자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것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세츠코는 죽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그들을 비판할 수 있을까? 지금의 관객들은 세이타에게 동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 세이타가 잘못했고 숙모가 옳았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무서운 생각이 든다."


근로 동원과 소방 활동은 국민들이 전쟁 중인 조국을 위해 함께 공장에 모여 전쟁 물자를 생산하고 공습으로 불이 나면 불을 끄러 다니는 활동을 말한다. 이는 개인의 모든 활동이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당시의 일본에는 군인을 국가의 기둥이라고 생각하는 군국주의도 널리 퍼져 있었다. 작품 속의 숙모는 이러한 전체주의, 군국주의 사상을 믿고 있는 당시의 평범한 일본인이다. 이를 앞의 인터뷰와 연계해보면, 잘못된 사상을 믿고 있는 숙모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범한 일상을 살고자 했던 주인공들이 죽음을 맞게 되는 모습은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로 인한 평범한 사람들의 피해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반딧불이의 묘>가 반전 영화가 아닌 이유는, 작중에서 주인공 세이타와 세츠코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전쟁을 초래한 원인이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이기 때문이다. 타카하타 감독은 영화 속에서 이를 내내 꼬집는다. 하지만 나는 이를 깨달음과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세이타에게는 잘못이 없는가?' 앞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 타카하타 감독은 세이타와 세츠코를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로 인해 자유롭고 평범한 일상을 살지 못하고 비극을 맞은 피해자로 보고 있다. 동시에 그는 세이타가 잘못되었고 숙모가 옳았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물론 나는 숙모가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세이타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세이타의 잘못은 그가 알량한 자존심 하나로 항상 잘못된 선택을 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이타는 숙모가 자신과 세츠코를 계속해서 구박하자 숙모 댁을 나와 주변의 방공호에서 새 살림을 차린다. 두 사람은 초반엔 그럭저럭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갈수록 식량은 점점 떨어지고, 세츠코의 피부병은 악화된다. 보다 못한 주변인들은 숙모께 사죄하고 돌아가길 권하지만, 세이타는 충고를 무시한다. 급기야 세이타는 일할 생각은 없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변의 밭을 서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끝내 세츠코는 세상을 떠나고, 세이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이 과정에서 세이타는 세 번의 잘못된 선택을 한다. 일이라도 하라는 숙모의 말을 무시하고 숙모 댁을 나온 것, 숙모께 사죄하고 돌아가라는 충고를 무시한 것, 일할 생각 없이 밭을 서리한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선택들은 세이타와 세츠코를 비극으로 몰고 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일'은 근로 동원과 소방 활동 등 군국주의, 전체주의 사상이 짙게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고도 잘못된 선택을 통해 하나뿐인 소중한 여동생 세츠코와 자기 자신을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떠민 세이타에게는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폭주하는 조국에 저항하지 않은 일본인들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의미한다. 세이타와 일본인들은 모두 잘못된 선택으로 비극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러한 생각은 잘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주인공인 세이타와 세츠코가 피를 나눈 남매라는 사실에서 기인되는 연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세이타가 혼자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세이타에게는 세츠코라는 여동생이 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역경을 해쳐나가던 남매가 끝내 비극을 맞게 되었다는 사실에 연민을 품게 되고, 이 연민이 세이타의 잘못된 선택이라는 잘못을 가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영화를 최대한 연민의 감정을 배제하고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렇게 하면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반딧불이의 묘>에는 다양한 평가들이 존재한다. 우선 맨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반전 영화라는 평이 주를 이루고, 일부 과격한 사람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피해자 행세를 하는 작품이라며 악평을 내리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평가들 역시 연민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남매의 비극이 슬프기 때문에 '전쟁이 남매를 비극으로 떠밀었으니 전쟁은 일어나선 안된다!'라는 평이 나올 수도 있고, '감히 전쟁을 일으켜 놓고 피해자라며 슬퍼해?'라는 평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연민을 제거하고 보니, 어째서 故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이 영화는 반전 영화가 아니라고 말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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