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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Jan 27. 2022

소녀종말여행

삶과 죽음은 어떻게 동일해져 나아가는가


인간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어가는 존재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것들을 쌓아 올려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되었고, 이 욕망으로 문명을 세워 오랜 시간 동안 이어올 수 있었다. 만화 <소녀종말여행>은 이러한 문명들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세계에서 주인공 치토와 유리는 이해할 수 없는 문명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다시 쌓아 올리며 할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시작된 소녀들의 여정은 독자로 하여금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지, 시작과 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해할 수 없기에 새로운 것들

작중의 문명은 전쟁으로 멸망한 상태다. 이로 인해 주인공 치토와 유리는 정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상식으로 취급되는 것들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초콜릿 맛 전투식량을 먹으면서도 정작 초콜릿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훗날 진짜 초콜릿을 맛보게 되었을 때에도 그저 초콜릿 맛 전투식량이겠거니 생각할 정도다. 그러나 이 무지는 오히려 인간이 일구어 온 문명을 다시금 되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도 하고, 기존의 문명을 새로운 시선에서 해부하고 재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 기회를 통해 치토와 유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념들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체득하고, 활용하며, 즐긴다.


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작중에서 치토는 전쟁을 '상대와 나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때 무기를 들고 싸울 수밖에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꽤 훌륭한 해석이다. 그러나 치토는 이 정의를 원론적으로만 이해한다. 여기서 전쟁의 정의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인물은 유리다. 치토의 설명을 들은 유리는 귀중한 식량이 하나만 남게 되자 지체 없이 치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어 식량을 차지한다. 그제야 치토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되고, 이에 유리는 이것이 전쟁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처럼 치토와 유리는 역할을 나누어 다양한 관념들을 독창적으로 재구성한다. 치토는 지식을 제공하고, 유리는 이를 토대로 관념을 새롭게 복원한다.


그렇게 치토와 유리는 다양한 관념들을 복원하고 즐기며 차곡차곡 쌓아 올려간다. 앞의 예시처럼 전쟁과 같은 인간의 추악한 면이 담긴 관념을 복원하기도 하는 한편, 음악이나 노래(발성을 통한 음악), 미술 등 인간이 자신만의 관념을 담아 창조해 온 문화를 복원하기도 한다. 두 사람은 하루 먹을 식량과 주변에서 도사리고 있을 위험을 걱정해야 하는 멸망한 세상에서 쓸모없는 잔재나 다름없는 수많은 관념들을 향해 일일이 질문하고 기억하며 끝내 이를 되살린다. 이러한 두 사람의 모습은 인간이 질문과 사유, 그리고 기억이라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문명을 일구어낼 수 있었고, 동시에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음을 상기시켜준다.


절망과 친해지는 방법

나는 앞에서 인간은 죽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남은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을 쌓아 올려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만화가 이야기하는 욕망, 즉 목표는 조금 다르다. 등장인물들이 남은 시간 동안 자신들만의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는 것에서는 비슷하지만, 이 목표가 죽어가는 동안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닌 멸망해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작용한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목표의 의미를 증명하듯 이 만화의 등장인물 중 주인공을 비롯한 인간 캐릭터들은 크든 작든 자신만의 삶의 목표를 정해둔 채 언제 절망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세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 일행을 제외한 인간 캐릭터인 카나자와와 이시이는 각각 지도 제작과 옆 도시로 향하기 위한 비행기의 제작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해둔 목표 덕분에 멸망한 세계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채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카나자와는 승강기를 오르다 지금까지 만들어 온 지도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생각까지 하지만, 주인공들의 격려와 새로운 지도를 만든다는 목표 덕분에 다시 살아간다. 또한 비행기를 완성하고 옆 도시로 향한 이시이는 비행기의 고장으로 인해 추락하고 말았음에도 비행기를 끝까지 완성한다는 목표를 달성한 덕분에 실패의 아쉬움을 후련하게 털고서 낙하산을 타고 아래층에서 다시 살아가려 한다.


치토와 유리 역시 서쪽 고개 너머의 탑을 오르라는 할아버지의 유언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덕분에 그들은 어떤 고난과 위험이 찾아와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삶의 목표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불어넣어 준다. 그 예시로 카나자와는 정해둔 목표가 물거품이 되었음에도 다시 일어설 의지를 갖게 되고, 이시이는 목표를 절반밖에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후련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에 유리는 '절망과 친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삶의 목표를 정해두는 것이다. 설령 그 시련이 불가항력적 절망의 집합체인 죽음일지라도.


삶과 죽음, 시작과 끝

만화 <소녀종말여행>의 가장 핵심적인 고찰 중 하나는 단연 삶과 죽음, 시작과 끝에 대한 고찰일 것이다. 치토와 유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다양한 의문을 품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는 것은 얼마나 무서울까?' 그들은 자신을 향해,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리고 이에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답한다. 치토와 유리, 더 나아가 <소녀종말여행>이라는 만화가 내린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의 의미에 대한 결론은, 서로 대비되어 보이는 듯한 이 개념들도 결국에는 동일한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화의 후반부, 치토와 유리는 도시의 최상층에 가까워질수록 소중했던 것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게 된다. 이동수단이자 집이기도 했던 케텐크라트는 고장이 나고, 소중히 간직했던 책들과 일기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불길 속으로 던져지고 만다. 그렇게 두 사람은 최상층, 혹은 죽음으로 향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계단 앞에 도착한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어둠 속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유리는 치토에게 죽는 것이 두렵냐고 묻는다. 치토는 이에 긍정하고, 유리도 동감한다. 다시 유리가 말한다. "아주 옛날에 난 어둡고 좁은 장소에 혼자 있었는데, 그게 굉장히 무서웠어. 태어나고 얼마 안 됐을 때, 아니면 태어나기 전일지도 몰라."


이는 매우 절묘한 말이다. 유리는 태어나기 전, 어둠만이 가득했던 곳을 두려워했다. 아마도 어머니의 뱃속이었을 것이다. 이는 삶을 의미한다. 똑같이 유리는 어둠만이 가득한 계단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치토와 유리가 최상층에 도착한 다음 날 사후세계로 향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계단은 죽음으로 향하는 마지막 순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삶과 죽음은 서로 대비되면서도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통해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된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내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도 볼 수 있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많은 인간들이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를 보강하는 것은 인류 최초의 그림과 인류 최후의 그림이다. 어느 날, 치토와 유리는 멸망한 세계에서 덩그러니 남겨진 그림이나 조각들이 모여있는 미술관을 발견한다. 미술관에서 치토는 늘 그랬듯이 그림의 의미에 대한 지식을 설명하고, 유리는 그림을 남겨 벽에 건다.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에는 인류 최초의 그림인 동굴 벽화와 인류 최후의 그림인 유리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의 주제는 비슷하다. 동물들의 모습이 그려진 동굴 벽화는 식량을 얻기 위한 사냥 연습을 위해 만들어졌고, 치토와 유리가 물고기를 들고 있는 그림에는 배고픔이 담겨 있다. 이는 시작과 끝도 결국에는 동일하다는 일종의 비유다.


이처럼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은 대비된 듯하면서도 동일하다. 이는 마지막화를 통해 비로소 작품의 진정한 주제로 귀결된다. 홀몸으로 최상층에 도착한 치토와 유리는 자신들이 앞으로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에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늘, 사후세계와 맞닿은 최상층에서 즐겁게 뛰논다. 이 장면이 바로 작품의 진정한 주제다.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은 결국엔 같은 것이니,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말라. 시작에 감사하며, 삶을 즐기며 나아가라. 그렇게 죽음과 끝이라는 절망과 친해지면서, 겸허히 마지막을 받아들여라. 그것이 바로 살아간다는 것이고, 죽어간다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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