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을 길러낸 시대를 기억하라
2018년, 시인 고은은 폭로 하나로 쌓아온 명성을 모두 잃었다. 친목과 인맥, 정치적 이념으로 만들어진 권력은 그렇게 무너졌다. 동시에 한 작품이 주목 내지 재평가를 받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유명한 작가 이문열의 <사로잡힌 악령>이 바로 그것이다. 이문열은 1994년에 이 작품을 썼지만, 문단의 비난을 받으며 스스로 봉인했다.
그 후 이문열은 이렇게 항변했다. ‘나는 그 시대의 한 특이한 개성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했을 뿐, 특정 인물을 공격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이에 나는 생각했다. ‘과연 그럴까? 비난을 회피하고자 하는 빈말이 아닐까?’ 이 생각은 서서히 바뀌어갔다. <사로잡힌 악령>은 그 시대의 특이한 개성이 형상화되어 있다. 독재와, 이를 먹고 자란 운동권의 타락이라는 개성이.
악령은 처음부터 자신의 악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선 그는 명사(名士)를 사냥하며 권력에 기생한다. 그다음은 기술이다. 악령은 이제 검소한 승려의 탈을 벗고 권력을 등에 업으며 자신의 기술을 화려하게 선보인다. 이는 부조리하다. 그러나 실체를 붙잡을 만큼 꼬리가 길지는 않았기에, 주인공은 악령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고도 이를 갈기만 할 뿐이다.
악령은 대담해진다. 기술과 명성을 앞세워 유부녀를 유혹하고, 침대 위에서 문학소녀를 울리며, 대담하게 여대생의 옷을 벗긴다. 그럼에도 악은 단죄되는 것인가? 시간이 지나며 문단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악령의 여성편력도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대의 특이한 개성은 악령을 사로잡을 사슬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독재였다.
악령은 독재라는 악에 저항하며 민주화에 목숨까지 거는 저항시인이 되어있었다. 민중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고, 동지들은 그의 악행을 덮어주었다. 이제 아무도 그를 사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민주화 후에도 악령은 운동에서 멀어졌다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민족시인이었다. 그는 거만해졌다. 한때 악령이 따랐던 명사들은 그의 시집에서 하대되었다.
악행은 권력으로 만들어진 명성에 의해 철저히 함구되었다. 만일의 사태를 방지할 악령의 자서전도 연재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다. 먼발치에서 악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 순간, 웃음이 마구 터져 나온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악령의 몸에 사슬을 묶고 다시는 빠져나올 길 없는 감옥으로 끌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는 시대의 특이한 개성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줄거리 요약에 밝혀둔 군사독재다. 60년대 후반, 악령에게는 위협이 닥쳐온다. 하지만 그는 군사독재를 비판하며 부활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영화 <살인의 추억>에 대한 박평식 평론가의 ‘흉악범을 길러낸 시대를 기억하라’는 평이 떠올랐다. 우린 악령을 길러낸 시대를 기억해야 한다.
두 번째 개성은 운동권의 타락이다. 악령은 민주화 이후 운동에서 서서히 발을 빼면서도 경력은 유지하며 자신을 포장하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운동권도 그랬다. 그들은 정계나 문화계에 진출해 권력을 얻었고, 일부는 반대 의견을 탄압하고 자신의 과거를 포장하기도 했다. 앞에서 말한 박평식 평론가도 그런 자들을 지지한다.
하지만 악령은 끝내 사슬에 사로잡힌다. 가족이라는 사슬에 말이다. 이제 악령은 평생을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한다. 그는 이제 홀몸이 아니기에, 자신의 악을 묻어둘 수 있었던 때와는 달리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타락한 운동권들도 그러하다. 그들에게 높은 위치는 사슬이 된다. 이제 그들은 과거의 악행이 발각될까 가슴을 졸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사로잡힌 악령>은 이런 작품이다. 추악한 과거를 감추고 명성을 쌓으며 살아가는 시인? 그런 건 시대를 형상화하는 도구일 뿐이다. 물론 그 시인과 문단 권력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없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독재 정권 시대와 운동권 타락 시대라는 특이한 개성을 형상화하는 것이 이문열 작가에게는 1순위의 작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은의 성폭행과, 이를 묵인했던 문단 권력의 행태는 분명 악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손가락질하기에 앞서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악령들을 길러낸 시대를 잊고 있지는 않은가? 악령들이 자신들의 악행을 포장하고 있는 시대에서, 그들의 말놀림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끊임없이 생각해보고,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