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등단도, 쓰라린 몰락도 필름 속에 고스란히 담기기에
여러분들께는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있으신지? 부끄럽게도 내게는 없다. 나는 분명 영화를, 독서를, 게임을, 음악을 사랑한다. 애니메이션은 이들보다 더욱 특별한 감정을 갖고 사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내게는 없다. 하지만 여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영화를 사랑하는 자가 만들어낸 작품이 있다. <바빌론>. 영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신작이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위플래쉬>와 <라라랜드>, 그리고 <퍼스트맨>을 탄생시킨 바로 그 감독이다. 영화 <바빌론>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영화를 사랑해 왔던 자신이 걸어온 지금까지의 족적과, 앞으로 걸어갈 영화감독으로서의 생을 총망라하여 탄생시킨, 영화라는 예술에 바치는 3시간 동안의 장대한 고백극이다.
화려한 등단도, 쓰라린 몰락도 필름 속에 고스란히 담기기에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 <바빌론>은 무성 영화의 시대에 화려하게 등단해 활약해 왔던 영화인들이 유성 영화의 등장이라는 거대한 변혁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쓰라리게 몰락해 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그 과정에서 셔젤 감독은 화려한 등단과 쓰라린 몰락을 각각 화려한 저택의 파티와 역겨운 동굴의 파티에 비유하고, 극명하게 대조시키면서 주인공들의 일대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영화의 오프닝에서 넬리는 화려한 저택의 파티에서 영화에 캐스팅된다. 이는 파티 도중 약에 취해 쓰러져 영화에 출연할 수 없게 된 누군가를 대신한 것이었다. 이후로도 넬리는 화려한 저택의 파티에서처럼, 약에 취해 쓰려졌던 누군가처럼 광란의 배우 생활을 이어가며 영화에 출연하고, 그렇게 스타가 되어간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는 찾아왔다. 무성 영화의 시대는 지나갔고, 유성 영화의 시대는 찾아왔다. 이제 더 이상 시끄럽고 난잡한 무성 영화 시대의 촬영장은 볼 수 없게 되었고, 소름이 끼칠 만큼 조용한 유성 영화 시대의 세트장이 생겨났다. 넬리는 이러한 시대에 적응하고 싶었음에도 적응하지 못했고, 자신이 대신했던 이름 모를 배우처럼 약에 취해가기만 할 뿐이다. 그런 넬리를 대체하는 것은 역겨운 동굴의 파티에서 살아있는 쥐를 잡아먹는 기인이다. 누군가는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밝고 화려한 파티에서 캐스팅된 넬리와, 어둡고 역겨운 파티에서 살아있는 쥐를 잡아먹는 기인이 같은가?' 같다. 정확히는 상반된 파티를 주최한 자들, 넬리와 기인을 추천하는 자들은 같다. 한쪽은 밝아 보이고, 다른 한쪽은 어두워 보이지만,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넬리는 쓸쓸히 사라진다. 매니가 친구를 데리러 간 사이, 가로등만이 빛나고 있는 밤의 거리를 걸어 나가며 사라진다. 마치 영화의 엔딩처럼. 하지만 과연 그녀의 엔딩이 쓸쓸하기만 한 것일까? 넬리는 매니와의 사랑을, 배우로서의 일대기를 필름 속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렇기에 쓰라린 엔딩일지라도, 누군가는 그녀의 모습을, 필름 속에서 화려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영원히 바라봐줄 것이다. 이러한 영원의 엔딩은 넬리만의 것이 아니다. 매니를 발굴했던 명배우 콘래드 역시 영원의 엔딩을 맞는다. 콘래드는 넬리보다도 유성 영화의 시대에 적응하고자 노력했던 배우였다. 유성 영화가 탄생하자마자 무성 영화의 시대는 지나갔고, 유성 영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스스로 선포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콘래드의 노력을 관객들은 비웃는다. 그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콘래드가 알아차리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여성에게 차일 때마다 자살을 시도할 만큼 심약했지만 늘 자신을 알아봐 주었던 친구 조지가 끝내 세상을 떠나버렸을 때일까? 사실 콘래드는 그전부터 자신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인정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보상받지 못하는 쓰라림을 인정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하지만 콘래드는 결국 사실을 받아들인다.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보았던 칼럼니스트가 남긴 말, 당신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후대의 누군가는 필름 속의 당신을 친근하게 여기게 될 것이라는 말 덕분이었다. 이후 콘래드는 깨닫고 인정한다. 자신은 무성 영화라는 시대의 명배우였으며, 필름이라는 영원 속에 남았다는 사실을. 그렇게 명배우 잭 콘래드는 무성 영화의 시대에 총을 겨누어, 끝맺는다.
무성 영화의 시대는 지나갔다. 흑백 영화는 컬러 영화로 바뀌었다. 그런 새로운 시대 속에서, 매니 토레스는 오랜만에 할리우드로 돌아와 무성 영화가 유성 영화로 대체되던 시기를 다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를 관람한다. 그는 영화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쓰라리게 사라졌던 넬리를, 콘래드를 발견한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는 과거와 미래를 본다. 필름을, 활동 사진을, 열차의 도착을, 무성을, 유성을, 컬러를, 시네마스코프를, CG를, 디지털을 본다. 끝내 깨닫는다. 자신은, 넬리와 콘래드는, 이름 모를 수많은 과거의 영화인들은 쓰라리게 사라져 갔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눈물을 흘리며 보고 있는 영화 역시 영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장면에서부터 <바빌론>은 '나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영화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데이미언 셔젤의 고백으로 변모한다.
총평
무엇이든 시간이 흐를수록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변화의 시간 속에서 영화계는 유성, 컬러, 시네마스코프와 비스타비전, CG, 디지털 등과 같은 혁신적인 기술들의 탄생을 목도하였다. 그만큼 도태되는 것들 역시 있었다. 무성, 흑백, 1.33:1, 필름 등의 기술들은 이제는 보기 드문 것들이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도태된 기술들과, 그 기술들로 만들어진 영화 속에서 살아가다 쓰라리게 몰락한 영화인들이 되살아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러나 촬영이라는 영화의 본질 속에서 그들은 영원할 수 있다. 카메라는 응시하고 있는 화면을 촬영해 필름 속에 담고, 필름은 현상을 통해 영화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 속에는 쓰라리게 몰락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영화관에 간다. 사라져 간 것들을 기억하고 사랑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