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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Feb 26. 2023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나는 애니메이션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한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애니메이션 영화다. 나는 애니메이션, 그중에서도 애니메이션 영화에 엄청난 기대 같은 것이 있다. 자, 그렇다면 한 가지 더 질문해보겠다. 나는 왜 애니메이션 영화에 기대를 갖고 있을까? 내가 애니메이션 영화에 기대를 갖고 있는 이유는, 실사(카메라로 찍는) 영화는 기본적으로 현실 세계를 카메라로 촬영하여 만들어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감독의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CG의 도움을 받더라도 표현의 한계에 부딪혀버릴 때가 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영화로는 현실이라는 한계로 인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종이나 태블릿에, 혹은 CG로 '그려서' 표현할 수 있다. 즉, 애니메이션 영화로는 실사 영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기에 나는 애니메이션 영화에 기대를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많이 보고, 좋아하는 영화감독들인 야마다 나오코, 하마구치 류스케, 클린트 이스트우드 세 명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인 야마다 나오코다. 자, 그럼 나는 왜 이 글을 쓰게 되었을까? 간단하다. 지금의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업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감독이 신카이 마코토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너의 이름은.>은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흥행 수입 3위, 역대 일본 영화 흥행 수입 5위라는 기록적인 흥행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신카이 마코토는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났다. 신카이 마코토가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니! 그래서 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를 간단히 소개한 뒤 그가 어째서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신카이 마코토 영화의 주제

신카이 마코토 영화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엇갈림과 제약 속 남녀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에서는 종의 엇갈림, <별의 목소리>에서는 공간의 엇갈림,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는 세계의 엇갈림(<별의 목소리>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초속 5센티미터>에서는 거리의 엇갈림, <언어의 정원>은 비가 오는 날 아침의 공원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제약, <너의 이름은.>은 시공간의 엇갈림, <날씨의 아이>에서는 운명이라는 제약이 등장한다. 그리고 엇갈림과 제약 속에서 사랑이 싹튼다. 이러한 주제를 뒷받침하는 것은 ‘세카이계(世界系)’ 장르다. 세카이계란 주인공과 그 일행 등을 포함한 개인적인 인간관계, 혹은 감정 문제가 세계 전체의 운명으로 귀결되는 서사 장르로, 二人だけだけの世界(두 사람의 세계)라는 말이 변형된 말이다.

 

세카이계라는 용어는 비평적으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웹사이트에서 퍼진 말이 문화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의 저서에서 개념화된 것이 계기라고 한다. 이러한 세카이계 장르를 가진 작품 중에서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가장 유명할 것이며, 앞서 언급한 일본의 문화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는 세카이계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영향 아래에서 발전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평가를 받는데, 감독 스스로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만큼 세카이계라는 장르에 있어서, 신카이 마코토라는 감독에 있어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소설의 영향력은 거대한 것으로 보인다.

 

신카이 마코토 영화의 구분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신카이 마코토 영화의 공통적인 주제는 ‘엇갈림과 제약 속 남녀의 사랑’이다. 하지만 이 주제를 구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제각각인 작품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신카이 마코토의 여덟 작품들을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어 제시하기로 했다. 그 결과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는 총 세 가지의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는 세카이계의 농도에 따라, 일본의 전통문화에 따라, 일본의 사회 문제에 따라 구 분할 수 있다. 먼저 세카이계의 농도에 따라 구분해보자. 편의상 농도라고 이름 붙였지만, 영화 속에서 세카이계라는 장르의 특성이 어느 정도로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지에 따라서 정해둔 구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농도는 強, 中, 無로 나누었다.

 

強으로 분류되는 영화는 두 작품으로, <별의 목소리>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가 이에 해당한다. 먼저, <별의 목소리>는 외계 문명의 공격을 받고 이들을 찾아 나선다는 SF를 배경으로 광년이라는 거리로 떨어진 지구와 아가르타라는 공간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또한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는 홋카이도에 위치하고 있는 의문스러운 탑에 저장되어 있던 평행세계의 정보가 주인공 소녀의 꿈과 연결된 상황에서 소녀와 사랑을 나눌 수 없는 주인공 소년의 심리를 다루는 작품이다. 이처럼 <별의 목소리>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는 설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특히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가 그러하다) 세카이계의 요소가 매우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두 작품을 세카이계 농도 強에 해당하는 작품들로 분류하였다.

 

그렇다면 中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무엇일까? 나는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를 中에 해당하는 작품들로 선택했다. 이 두 작품들은 분명 세카이계적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너의 이름은.>은 이토모리 마을을 파괴할 운명인 혜성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또 다른 운명으로 이어져 시공간을 뛰어넘는 소년소녀 타키와 미츠하의 이야기이고, <날씨의 아이>는 제물이 되는 것으로 폭우로 침수될 세상을 구한다는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 소녀 히나와 이 운명을 배반하려는 소년 호다카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앞서 말한 <별의 목소리>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보다는 세카이계의 요소가 현저히 약하다. 따라서 나는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를 농도 中으로 분류하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와 <초속 5센티미터>, 그리고 <언어의 정원>을 농도 無에 해당하는 작품들로 분류하였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는 ‘그녀’에게 주워진 ‘그녀의 고양이’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와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또한 <초속 5센티미터>는 아카리라는 추억의 첫사랑으로부터 기인된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극복하고 과거에서 벗어나는 남자 타카키의 이야기를 그리며, <언어의 정원>은 심리적으로 결여된 남녀 아키즈키 타카오와 유키노 유카리가 서로를 치유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즉, 이 세 작품들에는 세카이계적 요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찾아보자면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에 세카이계적 뉘앙스가 아주 약간 풍기고 있는 정도일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일본의 전통문화에 따라 구분해 볼 차례다. 이 기준에는 그저 일본의 전통문화가 등장하는 것을 넘어 영화의 주제에 깊게 연관되어 있는 작품들인 <언어의 정원>과 <너의 이름은.> 그리고 <날씨의 아이>가 해당된다. 우선 <언어의 정원>에는 일본의 전통 시가인 와카(和歌)가 수록되어 있는 시가집 만엽집(万葉集)이 등장한다. 여주인공 유키노 유카리는 남주인공 아키즈키 타카오에게 이 만엽집에 수록된 와카 중 하나를 불러주며 자신의 정체에 대해 넌지시 일러줌과 동시에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이후 작품 후반에서는 아키즈키 타카오가 유키노 유카리가 불러준 와카의 답가를 그녀에게 불러주면서 두 사람은 끝내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동시에 서로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 등장하는 일본의 전통문화는 동일하다. 일본의 토속 신앙인 '신토(神道)'가 바로 그것이다. <너의 이름은.>에서는 신사를 운영하는 미야미즈 가문의 여성에게 다른 남성과 몸이 뒤바뀌는 꿈을 통해 이토모리 마을에 충돌할 혜성을 막는다는 운명이 오랜 시간 동안 부여되어 왔고, 작중에서도 이러한 운명을 설명하기 위해 혜성의 충돌을 신토적 요소와 엮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미츠하와 뒤바뀐 타키가 할머니와 여동생 미츠하와 함께 미야미즈 신사의 신체에 쿠치카미자케라는 술을 봉납하는 장면이다. <날씨의 아이> 역시 폭우라는 재난을 막을 수 있는 하레온나(晴れ女)의 운명이 신토적 요소와 엮여있으며, 아예 히나가 신토의 상징인 ‘토리이(鳥居)’를 지나가며 기도하자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장면도 나온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사회 문제에 따라 구분해보자. 이 기준에는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가 해당된다. 먼저, <너의 이름은.>에는 2011년에 일어났던 도호쿠 대지진이라는 비극적인 재난에 대한 은유와 이 재난과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회적 메시지가 알기 쉽게 담겨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날씨의 아이> 쪽이다. <날씨의 아이>는 가정폭력이라는 피해를 받고 집을 떠난 호다카나 부모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 히나와 나기 같은 사회의 소수자들이 운명에 저항하는 것으로 세상의 기본 철칙에 반하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이다. 이러한 줄거리에서 우리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옳은가?’라는 추상적인 사회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세카이계의 농도, 일본의 전통문화, 일본의 사회 문제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들을 분류하였다. 그러나 여기, 어떤 기준에도 속하지 않은 영화가 한 편 남아있다. 바로 <별을 쫒는 아이>다. 이 영화는 세카이계 장르를 표방하고 있지도, 일본의 전통문화가 나타나 있지도, 사회 문제가 녹아있지도 않은 작품이다. 비교해보면 여러 가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들 중에서 <별을 쫒는 아이> 하나만큼은 그의 어떤 영화들과도 유사점을 발견하기 힘들다. 오히려 이 영화는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숨겨진 세계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는 것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인 <천공의 성 라퓨타>와 유사한 세계관 및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래서 <별을 쫒는 아이>는 다른 앞의 세 가지 기준을 따르지 않고 따로 분류하였다.

 

신카이 마코토 영화의 장점

사실 나는 신카이 마코토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해야 할 점은 칭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카이 마코토의 장점으로 뛰어난 촬영(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디지털화가 이루어진 이후 촬영은 시각효과 작업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을 꼽는다. 실제로 그의 촬영 기술은 매우 뛰어나다. 신카이 마코토에 맞먹을 정도로 촬영에 신경 쓰는 촬영 감독이나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꼽으라면 ufotable 소속의 촬영 감독 테라오 유이치와 피사계 심도, 광원 효과와 같은 카메라의 특성 그 자체를 구현하려는 시도를 많이 보여주는 제작사인 교토 애니메이션을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요즘은 신카이 마코토의 촬영에 영향을 받는 감독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아라키 테츠로가 그러하며, 사실 테라오 유이치도 신카이 마코토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보다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신카이 마코토의 장점은 거리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 전반에는 거리감이 짙게 깔려있다. 애초에 엇갈림과 제약을 주제로 사용하는 감독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러한 거리감의 표현에 있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초속 5센티미터>에서 거리감은 가장 극대화된다. 이 영화는 총 3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매화마다 거리감과 속도의 이미지로 인간관계를 다루어내고 있다. 1화에서는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와 눈이 내리는 속도로 두 주인공의 거리감을 표현한다. 초속 5센티미터로 벚꽃잎이 떨어지는 거리를 함께 걸어가는 초등학생 시절 주인공들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모두 가깝다. 그러나 이 거리감은 주인공들이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반전된다.

 

어두운 밤, 천천히 내리는 눈을 맞으며 입을 맞추는 현재 주인공들의 거리는 물리적으로는 가깝다. 그러나 입맞춤으로 절정에 이른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는 그들이 지금 맞고 있는 눈이 내리는 속도처럼 천천히, 점점 멀어져 갈 것임이 명확히 암시된다. 2화에서는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로켓의 속도 및 로켓과 지상의 거리로 두 남녀의 거리감을 표현한다. 소녀는 소년을 좋아한다. 하지만 소년은 눈이 내리는 날 입을 맞추었던 소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소녀는 결국 소년은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을 것이라 사실과 지금까지 존재했던 자신과 소년 간의 거리감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이 로켓을 통해 표현된다. 로켓과 지상의 거리처럼 자신과 소년에게는 큰 거리감이 존재했고, 소년은 언젠가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저 로켓처럼 자신과 마을의 곁을 떠나 저 멀리 향해버릴 것이다.

 

3화에서는 첫사랑과의 거리감을 극복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남자는 오랜 시간 첫사랑과의 거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연애를 해도 금방 헤어지기 일쑤였고, 그의 몸에는 무기력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철로를 지나던 남자는 우연히 첫사랑의 모습을 보게 되고, 뒤를 돌아보려던 찰나 열차가 지나가며 그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열차가 떠나고, 바라본 철로의 건너편에 첫사랑은 없다. 하지만 남자는 후련하게 갈 길을 간다. 그렇게 첫사랑과의 거리는 가까워진 후 완전히 멀어져 추억으로 남는다. 지금까지 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장점인 ‘거리감의 표현’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영화 <초속 5센티미터>를 통해 설명하였다. 나는 신카이 마코토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러한 거리감을 표현하는 연출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단점

바로 앞에서 나는 신카이 마코토를 칭찬했다. 그러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신카이 마코토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단점은 전기 영화인지, 후기 영화인지에 따라 다르다. 내 기준에는 <너의 이름은.>부터 후기 영화다. 전기 영화의 단점은 장르의 강도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너의 이름은.> 이전까지 신카이 마코토는 극단적으로 세카이계에 치우쳐 있거나 극단적으로 세카이계가 배제된 영화를 만드는 모습을 보였고, 이는 작품성의 기복을 초래했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부터는 세카이계 장르와 대중성, 그리고 사회적 메시지를 적절히 융합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었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게 신카이 마코토는 전기 영화의 단점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에 신카이 마코토도 자신감이 붙었는지 그는 앞으로 상업 영화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차기작인 <날씨의 아이>는 안전을 의식한 듯 일본의 전통문화와 사회 문제를 결합하는 <너의 이름은.>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대중성을 잡는다는 강박에 시달린 것인지 오히려 대중성으로부터 어긋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특히 선정성이 부각되는 것이 그러하다. <날씨의 아이>에는 주인공 호다카가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소파에서 자고 있던 여성 나츠미의 몸을 훔쳐보는 장면이 나온다. 몸을 훔쳐보던 호다카는 나츠미가 깨어나자 깜짝 놀라고, 나츠미는 그런 호다카에게 자신의 몸을 훔쳐보았냐며 능청스럽게 놀린다. 이러한 장면은 영화의 전개에 필요 없는 ‘서비스 신‘으로, 신카이 마코토는 이를 대중적 코드로 착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오타쿠 코드에 가깝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들지도 모른다. '<너의 이름은.>에도 주인공인 미츠하와 타키가 서로의 몸을 향한 성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물론 그러하다. 다만 이는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10대 소년소녀들의 성적 호기심이라는 측면이 더 강하게 다가오고 있기에 어느 정도 감안하여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날씨의 아이>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중성을 빙자한 오타쿠 코드는 영화의 플롯과 인물들의 행동 역시 망쳐버리고 말았다. <날씨의 아이>는 마치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하 미연시)’ 같은 영화다. 남주인공 호다카가 히나 씨를 포기하느냐 마느냐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선택을 거듭하며 여주인공의 호감을 얻어나가는 것에서 미연시와 유사한 구조의 플롯과 인물의 행동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결국 ‘갈등, 선택, 갈등, 선택, 그리고 엔딩’이라는, 영화적으로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플롯을 결과물로 내놓게 만든다. 실제로 호다카는 마치 끝없이 선택하는 기계 같은 인물로 비친다. 그가 두 가지 선택지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갈등하는 과정이라도 심도 있게 그려냈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다. 그렇다면 인물들의 행동은 어떨까? <날씨의 아이>에서 인물들의 행동은 오타쿠 코드로 과장되어 있다. 계획에 성공하고 하늘 높이 점프하며 “해냈어!” 하고 외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생각해보자. 과연 현실에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존재할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많이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는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이다. 결국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오타쿠 코드를 대중성으로 착각한 것 같다는 생각만 들뿐이다.

 

개인적인 생각

앞에서 나는 신카이 마코토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 밝혔다. 그럼에도 신카이 마코토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작품성은 제쳐두고, 흥행 면에서만 보면 신카이 마코토는 역대 일본 영화 흥행 수입 5위라는 기록적인 흥행을 이루었다. 여기서 순위가 더 높은 애니메이션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소토자키 하루오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뿐이라는 점에서 신카이 마코토가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평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신카이 마코토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의 차기작에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좋든 싫든 어떤 영화의 흥행은 업계에도 바람을 일으켜 흥행한 영화와 유사한 연출과 플롯을 가진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작품들을 제작하고 개봉시키는 과정에서 새로운 감독이나 작화감독, 혹은 원화가나 프로듀서 등의 제작진들 역시 대거 발굴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도 내가 신카이 마코토의 차기작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이외에도 유행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모습으로 팬들을 즐겁게 하는 아라키 테츠로, 나가이 타츠유키 같은 감독들이 나타나는 부수적 효과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따라서 나는 신카이 마코토가 <너의 이름은.>으로 쌓아 올린 지금까지의 기록적인 흥행 성적들을 계속 유지해나간다면, 흥행적으로는 충분히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작품적으로 본다면 신카이 마코토에게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칭호를 붙여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도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감독들 중에서는 호소다 마모루, 유아사 마사아키, 야마다 나오코, 신카이 마코토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 나는 여기서 언급된 감독들 중에 가장 영화를 못 만드는 감독이 신카이 마코토라고 생각한다. 호소다 마모루가 <괴물의 아이>부터 비평적으로 조금씩 추락하고 있음에도 그렇다. 물론 야마다 나오코와 유아사 마사아키는 지금까지도 좋은 영화들을 만들고 있고. 개인적으로 이 4인의 순위를 매겨본다면 공동 1위는 야마다 나오코와 유아사 마사아키, 2위는 호소다 마모루, 3위는 신카이 마코토다. 이처럼 개인적으로는 4인의 감독들 중 최하위에 속하는 감독이 신카이 마코토인데,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이 가당키나 하겠느냐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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