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
시작하기 전에 말씀드리고자 한다. 나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젠가 업로드한 적이 있었던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라는 글에서도 비슷하게 이야기한 기억이 있다.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그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정말 별로였다. 세계 3대 영화제로 손꼽히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경쟁 부문으로 초청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따라서 이번 글은 <스즈메의 문단속>을 비판하는 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영화는 신카이 마코토의 최고작이 될 가능성이 있었을 정도로 뛰어난 영상을 보여준다. 신카이 마코토는 영상에 있어 다시 한번 진보했다. 그러나 각본에 있어서는 <날씨의 아이>를 이어 다시 한번 퇴보하였고, 결국 영화는 크게 무너졌다. 따라서 나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비판하게 되었다.
훌륭한 영상
<스즈메의 문단속>의 영상은 정말 훌륭하다. 작화, 촬영, 편집 등 영상을 구성하는 요소에 있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다시 한번 진보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비주얼리스트로서의 신카이 마코토는 세계 단위에서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감독일 것이다. 우선 작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사실 작화, 즉 인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신카이 감독의 영화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신카이 감독의 작품에서 화려한 배경과 효과를 두고 작화가 좋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은 작화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신카이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도 작화적으로 좋은 인상을 남긴 영화가 한 편 있는데, 바로 거장 작화감독 안도 마사시가 참여한 <너의 이름은.>이다. 안도 마사시 덕분에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의 작품들 중 거의 유일하게 작화로 고평가 할 수 있는 영화가 되었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작화는 <너의 이름은.>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을 다시 한번 선사했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 특히 스즈메는 정말 잘 움직인다. 이러한 작화는 후에 이야기할 촬영과 연결되면서, 스즈메의 여정을 표현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도쿄 파트의 작화는 고평가 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작화에 놀란 나는 작품에 참여한 애니메이터들의 이름을 찾아보기로 했고, 꽤 놀랐다. 작화감독을 맡을 정도의 실력 있는 애니메이터들이 원화 파트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애니메이터들의 이름만 나열해 보자면, 최근 큰 인기를 얻은 <봇치 더 록!>의 작화감독 케로리라, 교토 애니메이션에서 활약했던 작화감독 우에노 치요코 등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애니메이터들의 분투로 <스즈메의 문단속>은 뛰어난 작화를 선보일 수 있었다.
뛰어난 애니메이터들에 의해 만들어진 <스즈메의 문단속>의 작화는 뛰어난 촬영에 의해 더욱 돋보인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촬영이란 시각효과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실사 영화에서의 촬영, 즉 흔히들 카메라 무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할 생각이다. 우선 시각효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그 누구도 이견의 여지없이 호평할 수 있을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가장 큰 장기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신카이 감독에게 부족했던 것이라면 건물의 3D 모델링과 CG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조차 크게 개선된 모습을 보인다. 특히 CG는 호평을 아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스즈메가 열쇠를 이용해 문을 잠그는 과정을 표현하는 CG는 정말 대단했다고 생각하고, 영화를 감상하신 여러분들께서도 필히 그렇게 생각하시리라 믿는다.
진보한 카메라 무빙은 이토록 뛰어난 작화와 시각효과로 만들어진 무대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감히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실제 카메라 무빙의 80%까지는 따라갔다고 생각한다. 지난번 <체인소 맨> 리뷰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화면의 움직임과 인물의 움직임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화면은 어색해지고 마는데, 신카이 감독은 그 조화를 이루어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번 영화를 통해 확실해진 것은, 신카이 감독은 카메라의 동적인 요소에 통달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의 정적인 요소에 있어 신카이 감독은 아직 미숙하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신카이 감독은 카메라가 고정된 상황에서의 무빙에서는 어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핸드 헬드 기법에서 그러하다. 새삼스러운 것이지만 야먀다 나오코 감독이 선보이는 핸드 헬드의 위대함을 다시 느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대단했다고 생각했던 편집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사실 신카이 마코토 감독들에서 편집이라는 요소는 정말 별로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날씨의 아이>에서의 편집은 그중에서도 정말 별로여서, <너의 이름은.>에도 등장했던 뮤직 비디오 방식의 연출과 함께 영화의 흐름을 전부 끊어놓아 몰입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스즈메의 문단속>의 편집은 정말 대단했다. 후술할 각본의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몰입의 방해를 그나마 커버한 것은 편집이었다고 생각될 정도다. 그래서 나는 엔딩 크레딧을 읽으며 생각했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번 작품의 편집자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게 웬걸, <스즈메의 문단속>의 편집자는 신카이 감독 본인이었다. 어째서 신카이 감독은 전작까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편집하지 않은 것일까? 의문만이 들뿐이다.
잘못된 각본
지금까지 나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호평했다. 그러나 호평은 기술적인 면에 그칠 것이다. 영화에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세 가지 있다. 연출, 촬영, 그리고 각본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애니메이션 영화이니 작화 역시 포함될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연출과 촬영, 그리고 작화까지는 확실히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각본에서는 <날씨의 아이>에 이어 다시 한번 퇴보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나마 <날씨의 아이>가 두 걸음 퇴보했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한 걸음 퇴보했다는 점을 신카이 감독의 팬들은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스즈메의 문단속>의 각본은 잘못되었는가? 지금부터 이에 대하여 낱낱이 파헤쳐보도록 하자.
나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같이 본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의 이전 영화들과는 아예 다른 결을 가진 영화인 것 같다.'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감독의 이전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작들과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별을 쫒는 아이>, <너의 이름은.>, 그리고 <날씨의 아이>이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별을 쫒는 아이>를 기본 골자로 하여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의 모티프가 섞여 있다. 내가 이전에 작성한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여기서 조금의 신기함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신카이 감독은 <별을 쫒는 아이>의 모티프를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느꼈다. 이번 작품은 전작들보다 더욱 대중성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어째서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감독이 본격적으로 상업주의 노선을 걸으며 만들어낸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보다도 대중성을 노리고 있는 작품인 것일까? 그 이유는 <별을 쫒는 아이>가 대중성을 추구하려다 실패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내가 작성한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를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나는 그 글에서 <별을 쫒는 아이>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와 유사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즉, 신카이 감독은 <별을 쫒는 아이>에서 본인의 이전작에서 가져온 모티프가 아닌 스튜디오 지브리로부터 빌려온 모티프를 활용하여 대중성을 추구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풍'은 상당한 흥행 요소 중 하나이다. 지브리 출신 제작진들이 만든 <메리와 마녀의 꽃>이 흥행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신카이 감독은 이러한 흥행 요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너의 이름은.>으로 충분한 명성을 쌓은 지금이라면 다시 한번 그 요소를 활용해도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감독 본인만이 알고 있는 문제겠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이 <별을 쫒는 아이>를 골자로 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잡설이 길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스즈메의 문단속>에 들어있는 모티프에 대해 파악하고, 어째서 각본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우선 영화의 기본 골자가 된 <별을 쫒는 아이>. 사실 기본 골자라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대략적인 스토리 라인이 <별을 쫒는 아이>와 비슷하다고 이해하시는 편이 좋을 것이다. <별을 쫒는 아이>의 스토리 라인은 한 소녀가 신비한 소년을 만나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끌려 모험을 떠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스토리 라인 역시 이와 유사하다. 주인공 소녀 스즈메는 어느 날 신비한 청년을 소타를 만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이끌려 모험을 떠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즈메의 문단속>의 기본 골자이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의 모티프는 이러한 스토리 라인에 스며들어 있다. 신카이 감독은 이를 흥행의 요소로 연결 짓고자 하였겠으나, 이 요소들은 결과적으로 각본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자, 지금부터는 어째서 두 모티프가 각본을 망치게 되었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그전에 다시 한번 되돌아가 보자. <스즈메의 문단속>은 얼핏 보면 앞선 두 작품과는 다른 감성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너의 이름은.>처럼 한없이 깊이 파고 들어가는 로맨스도, <날씨의 아이>처럼 사랑하는 상대와 세계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세카이계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분명 깊은 로맨스이기도 하고(정확히는 그러고 싶은), 세카이계이기도 하다. 우선 스즈메와 소타라는 남녀 관계로 이루어진 구도는 당연히 로맨스로 비치고, 영화 중반에서 스즈메는 좋아하게 된 상대인 소타와 자신과 주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세카이계적인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특히 이 선택은 <날씨의 아이>의 후반부 선택 장면을 역으로 오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날씨의 아이>에서는 남주인공 호다카가 여주인공 히나와 세상 중 히나를 택하고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여주인공 스즈메가 남주인공 소타와 세상 중 세상을 택하고 홀로 하늘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날씨의 아이>처럼 선택으로 모든 이야기를 종결지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따라서 스즈메는 소타를 구하러 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 파트에서부터 <너의 이름은.>의 모티프인 깊은 로맨스가 문제를 일으킨다. 사실 깊지도 않다. 얄팍한 로맨스라고 하자. <너의 이름은.>에서 타키는 미츠하에게 조금씩 호감을 느끼게 된 끝에 결국 그녀를 구하기 위해 시공간을 뛰어넘게 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러한 <너의 이름은.>의 로맨스를 다시 한번 활용하는데, 문제는 관객들은 스즈메와 소타의 관계가 로맨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선택 당시까지의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 알아가는 관계 정도로만 보이는데, 스즈메는 '나는 이 남자가 정말 좋으니 구하러 가야겠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다. 신카이 감독은 어느새 미츠하를 좋아하게 된 타키처럼 스즈메 역시 소타를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겠으나, 각본은 이를 대변해주지 못했다.
신카이 감독의 각본에 대해 조금 더 나쁘게 이야기해보자면, 사실 <너의 이름은.>에서도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 좋아하게 되는 과정은 꽤 작위적이고,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애니메이션 특유의 정상참작이 먹혀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사 영화에서는 그럴 수 없겠지만,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는 '이건 애니메이션이니까' 하며 이해하는 관객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표현되는 사랑은 그러한 정상참작을 유도하지 못했다. 오타쿠인 나조차도 스즈메와 소타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일반 관객들이 과연 두 사람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스즈메의 문단속>이 흥행하기는 했지만, 그 흥행이 각본의 덕이라기보다는 기술의 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재난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스즈메의 문단속>의 모티프는 <너의 이름은.> 때부터 줄곧 활용되었던 재난의 이야기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서 활용되었던 재난들은 대개 은유에 그쳤다. <너의 이름은.>을 관통하는 소재인 혜성 충돌은 2011년의 도호쿠 대지진을 은유하고 있고, <날씨의 아이>의 폭우는 도호쿠 대지진 이후의 일본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 그러나 <스즈메의 문단속>의 재난은 확실하게 과거 일본에서 일어났던 재난을 직시하고 있다. 이는 스즈메의 여로를 통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스즈메가 방문했던 고베, 도쿄, 이와테는 모두 과거에 재난이 일어났던 지역이다. 1995년의 고베 대지진, 1923년의 관동 대지진, 2011년의 도호쿠 대지진이 바로 그러하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스즈메의 모험은 재난의 아픔을 기억하고 위로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재난의 기억과 위로'. 이 주제는 스즈메가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고 그 자신을 위로하면서 확실해진다. 스즈메는 대지진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고향 이와테를 떠났다. 그런 스즈메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와 아픔을 두 눈으로 직시하고, 위로하며, 끝내 끌어안은 채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여기서 나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가 떠올랐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 역시 아픔을 마주하고, 서로 위로하며, 끝내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스즈메의 문단속>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 범접조차 할 수 없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분명 유사성이 드러나고 있다고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스즈메의 문단속>에 드러나는 재난의 이야기는 전작들의 그것보다 확실히 좋았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각본만 제대로 집필했더라면, 분명 그의 최고작이 될 가능성이 있을 정도였다.
총평
나는 신카이 마코토를 싫어한다. 그는 항상 장르와 주제, 그리고 자신의 기술력에 기대버려 영화를 망치고 만다. <날씨의 아이> 같은 작품이 그렇다.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그 영역에 걸쳐 있다. 이번 작품은 여러모로 대단했다. 주제를 꿰뚫는 플롯은 꽤 잘 짜여있었고, 작화와 촬영, 편집 등의 기술들 역시 역대 최고를 경신했다. 그럼에도 <스즈메의 문단속>에 기시감이 들게 되고 마는 이유는 결국 각본에 있었다.
주인공 스즈메가 상처를 들여다본다는 선택을 하게 되는 첫 번째 동력은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의 묘사는 형편없다. 남녀의 관계 묘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감독은 두 사람의 관계를 사랑으로 결정지어버렸다. 그렇게 주제와 플롯을 떠받들던 이야기는 무너졌다. 스즈메가 사랑을 선언한 그 순간부터 영화를 구성하던 전작의 모티프들은 사라지지만, 이를 대체해야 했을 두 번째 동력인 가족애는 빠르게 소모되어버리고 만다.
재난의 상처를 직시하고, 미래로 나아간다는 주제는 <너의 이름은.>부터 오래 이어져왔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 주제의 문을 닫아야 할 영화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같은 주제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부 토해내었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좋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절반을 긍정하겠다. 기술적인 면과 플롯의 면에서 이 영화는 신카이 마코토의 최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구성하고 있는 각본은 <날씨의 아이>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따라서, 신카이 마코토는 각본을 쓰면 안 되는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