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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Jul 10. 2023

엘리멘탈

사랑이 이루어내는 것, 그럼에도 아쉬운 것


<라따뚜이>, <업>, <인크레더블>, <인사이드 아웃>, <코코>... 픽사는 언제나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였다. 그러나, 2020년대에 들어 픽사의 명성은 퇴색된 듯 보인다. 2020년 공개되었던 영화 <소울>을 제외하면, 최근의 픽사는 관객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이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최근 공개된 영화 <엘리멘탈> 역시 그런 픽사의 부진을 뒤집기에는 부족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말이 <엘리멘탈>을 혹평할 근거로 사용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엘리멘탈>이 부족한 작품이라는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전에 있었던 픽사의 황금기 시절 작품들에 비하여 그렇다는 말이다. <엘리멘탈>에는 분명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럼에도, 작품 곳곳에서 등장하는 보수성과 진보성이 대립하여 끝내 조화의 길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는 분명 흥미로운 지점일 것이다.

 

<엘리멘탈>은 간단한 영화이다. '불' 원소에 해당하는 여주인공 '앰버'는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하는(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인물이며, '물' 원소에 해당하는 남주인공 '웨이드'는 미국의 주류 인종인 백인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러한 두 인물이 만나고 사랑한 끝에 이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미국에 도착한 이민자가(사족을 붙이자면 아시아 이민자가) 어떻게 자신들의 전통을 보존하면서 정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다루는 영화가 바로 <엘리멘탈>이다. 얼핏 보면 복잡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영화가 시작되면 곧바로 주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쯤에서 내가 주목하였고, 여러분들께 들려드리고 싶었던 것은, 전통의 보존이라는 보수성과 꿈을 향해 새롭게 나아간다는 진보성의 대립, 그리고 끝내 아쉽게 다가오고 말았던 인종 문제에 관한 이야기다.

 

<엘리멘탈>은 주인공 앰버와 웨이드의 사랑을 다루는 로맨스 영화이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야기다. 물론 후술할 인종 문제와 엮여있기는 하지만, 지금부터 이야기할 주제에 비해 표면적인 것임은 틀림없다. 나는 <엘리멘탈>을 보수성과 진보성이 귀엽게 대립한 끝에 융합이라는 정석적인 답을 찾아내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수성은 전통의 보존에 해당하며, 진보성은 꿈과 사랑, 인종 및 이민자 문제에 해당한다. 여기서도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것은 전통의 보존과 꿈이다. 앰버의 아버지는 파이어랜드에서 건너온 이민자로, 엘리멘트 시티에서 살고 있지만 고향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인물이다. 반면 앰버는 엘리멘트 시티를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아버지의 꿈과도 같은 가게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예술이라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는 이민자 1세와 2세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만, 더 깊게 들어가 보면 보수성과 진보성의 대립으로 생각될 여지가 있다. 여기서 진보와 보수란, 정치적인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물론 영화 속에서 정치적인 의미로서의 보수성과 진보성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 비판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서, 앰버는 아버지의 가게를 이어 '불'의 정체성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의무감과, 그럼에도 자신의 꿈을 놓을 수 없다는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내적으로 갈등한다. 웨이드는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그는 앰버를 사랑하기에, 연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지켜주고자 한다. 이러한 웨이드의 모습은, 섞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도전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엘리멘탈>의 경우에는 그 도전을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 사랑은 보수성과 진보성의 귀여운 대립을 종식시키며, 섞일 수 없을 것 같았던 것들이 섞이도록 만들어준다. 앰버의 아버지는 고향의 정체성, 전통을 잇고자 하는 보수적인 인물이다. 다만, 그보다 더 강한 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덕분에 딸의 꿈을 인정하고, 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설 수 있도록 배웅해 준다. 앰버는 그런 아버지에게 '불'의 정체성을 담아 절을 올리며, 아버지는 이를 받아준다. 그렇게 보수성과 진보성은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정서와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하여 전쟁과 가난으로 황폐화된 고향을 등지고 도착했음에도 전통과 정체성을 지킨 1세와, 미국인이 되었음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꿈을 이루는 2세. <엘리멘탈>에는 그런 역사가 담겼다.

 

나는 <엘리멘탈>이 보여준 보수성과 진보성의 조화와 역사의 은유를 흥미롭게 보았다. 다만, 흥미를 거슬리게 만드는 아쉬운 점은 분명 존재했다. 인종 문제의 등장이라는 아쉬움은 미국 영화이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영화 속에서 메인으로 나타나고 있는 주제의 서사를 어지럽히고 말았다. 물론 이민자들의 인종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엘리멘탈>에서의 인종 문제는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인종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리는 선에서 그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답이 바로 앰버와 웨이드의 사랑이며,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그렇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또한, 두 인물의 사랑이 전통의 보존과 꿈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대립을 종식시켰으므로, 영화의 메인 주제와도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엘리멘탈>의 인종 문제는 조금 과도해졌다. 감독은 '불'이 차별받는 모습을 통해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차별받는 현실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의도는 좋았지만, 문제는 이로 인하여 앰버의 꿈에 대한 고찰이 명확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앰버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보수하거나 만들어내는 묘사는 계속해서 등장하였다. 이 묘사가 꿈으로 발전하는 것은 해변가에서 모래를 유리로 만들고, 이를 다시 하나의 작품으로 창조해 내는 장면이다. 이를 통해 앰버의 꿈은 드러난다. 이후의 장면에서는 앰버가 그 꿈을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나는 조금 의아했다. 해변가 장면에서는 분명 앰버가 자신의 꿈을 처음으로 자각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해변가 장면 이전에는 앰버의 꿈에 대한 묘사가 딱히 없었으므로, 나는 의아해했던 것이다.

 

여기서 아쉬움이 나타난다. 분명 앰버의 꿈을 묘사할 수 있는 시간은 존재했기 때문이다. '불'이 차별받는 장면을 줄이고, 앰버의 꿈이 묘사된 장면을 만들어 넣었다면, 나는 의아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차별받는 장면을 통해 아시아계의 고충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엘리멘탈>은 아시아계의 고충만을 이야기한 다음, 엔딩 장면에서 다양한 원소들이 등장하는 파이어플레이스를 비추는 것으로 '차별은 해소되고 다 함께 어울려 살았답니다'를 시전해 얼렁뚱땅 끝나버린 영화였다. 즉, 그 중간의 해소 과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럴 거면 차라리 차별을 묘사하는 대신 꿈을 묘사하여 이야기를 탄탄하게 만드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앞서 이야기한 보수성과 진보성의 대립이 정치화된 사례이다.

 

이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엘리멘탈>은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다. 고향의 정체성을 지키고 이어나간다는 보수성과, 꿈과 사랑, 인종 및 이민자 문제라는 진보성이 귀엽게 충돌한 끝에 융합이라는 정석적인 답을 찾는 이야기. 영화의 주제는 그러하다. 그 과정은 흥미로웠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내가 처해있는 개인적인 상황은 인종 문제를 줄이고 꿈과 고향을 세심하게 묘사했다면 더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꽤 보수적인 사람이다. 단지 보수적인 성향보다도 자유주의를 더 우선적인 가치로 두고 있기 때문에, 성향을 억눌러서 나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 타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나의 보수성은 집안의 내력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나의 조상들은 같은 장소에서 200년 가까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 200년이라는 시간을 이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유교적인 가치관에서 나오는 생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저 그 장소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고향에서 일생을 끝마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나는 꿈과 고향이라는 대립각에서 융화의 지점을 발견한 엠버에게 공감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녀가 부러웠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영원히 살 수 있기를 바라기만 했을 뿐이었으니까. 따라서 인종 문제의 어중간한 극대화가 영화를 구성하는 메인 주제와, 이를 표현하기 위한 과정 및 결과를 침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수성과 진보성의 대립이 정치적일 필요는 없다. 픽사가 그 사실을 다음 작품에서 표현하여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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