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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Jul 07. 2023

보 이즈 어프레이드

두려워 미쳐버린 불쌍한 아이


요즘 기사를 읽다 보면,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며 자신의 뜻대로 아이를 틀에 가두고 조종하는 부모의 사례를 자주 볼 수 있다. 덕분에 나는 난해하기 짝이 없었던 아리 애스터 감독의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영화와도 같은 일이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난해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니...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제목 그대로 두려움에 몸부리치며 달아나는 영화다. 동시에 한 인간이 망가져가는 이유에 대해 하나의 답을 내리기는 영화이기도 하며, 관객은 두려움 끝에 그 명확한 답에 안타까워할 수도, 공감할 수도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추천하지 않는다.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작품의 의미를 이해해 버리는 순간 감상에 따라 끝없이 우울해질지도 모른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난해하다. 솔직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도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본 결과를 이야기해 보자면,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트루먼 쇼>와 부모의 억압이라는 두 키워드를 숙지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피로 이어졌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억압한 끝에 두려워하며 도망치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기어코 손아귀에 넣으려는 어머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모든 컷은 독립하고자 하는 아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어머니의 대립으로 연출되어 있다. 그 대립은 어머니의 승리로 끝이 난다. 결국 아들은 주체의지를 상실한 채, 어머니를 따르게 된다. 그러나, 전부 두려움에 의한 강압임을 모두가 안다.

 

어머니의 난해한 강압을 이해하는 순간, 아들과 관객들은 공포에 벌벌 떨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아들과 어머니의 대립은, 전부 어머니가 설계한 판 위에서 벌어진다. 집 앞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인해 본가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보는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애초에 아들이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부터 모든 컷들은 난해해지면서, 대립이 시작된다. 내가 영화를 감상하고 이해한 어머니 모나의 계획은 이러하다. 외과의사 부부를 매수하여 보를 차로 쳐버린 다음, 그들의 집에 구속해 약과 상담 등으로 정신을 지배한 후, 그대로 자신의 눈앞에 대령시킨다. 물론 보는 이 사실을 1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뇌리에 각인된 어머니의 억압이 불러일으킨 공포는 무의식적으로 대립을 촉발시킨다.

 

이제 보는 어머니의 두려운 강압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도망쳐, 스스로 어른이 돼야 한다. 이러한 보의 도주에서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몇 부분 발견된다. 우선 외과의사 부인의 행동이다. 그녀는 보에게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쪽지를 남기거나, 그의 과거와 미래가 모두 촬영되어 있는 CCTV를 볼 수 있는 채널 번호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이는 후술할 <트루먼 쇼>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자, 부인이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부인의 상냥함은 그녀의 모성이 발현되었을 때 뒤집어지게 된다. 자신의 딸 토니가 부모를 갈구하며 자살하자, 지금까지 상냥했던 부인은 반대로 돌변, 보를 살인자이자 자신의 아들을 대체하려는 악마로 취급해 지브스에게 보의 뒤를 쫓도록 명령한다. 여기서 우리는 부인의 모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보의 어머니의 모성과 관련지을 수 있다.

 

보의 어머니는 침착하면서도 지극한 모성을 갖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녀의 속에는 아들을 사랑하는지조차 의문인 지배욕이 들어차있다. 반면, 외과 의사 부인이 모성을 발현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딸의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하고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로서 생각될 여지가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을 동일선상에 두고 보았을 때, 우리는 분명 진정한 어머니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지점은 보가 외과의사의 저택에서 도망쳐 만난 유랑 극단의 공연을 관람하는 장면이다. 공연의 내용은 양친을 잃은 아이가 가정을 일구고, 해일을 만나 가족과 떨어지지만, 깨달음 끝에 재회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망상이다. 보는 억압 속에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가정을 일구지 못했고, 애초에 어머니의 손아귀에 있었기에 떨어질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망상은 의미 있다. 보가 어머니로부터 독립할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의지는 어머니에 의해 끊긴다. 외과의사 부인이 보낸, 즉 어머니가 보낸 지브스에 의해 보는 다시 한번 도망치게 된 것이다. 그 도망의 종착점이 본가라는 점에서, 보의 의지를 끊은 것은 외과의사 부인임과 동시에 보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주어진다. 따라서 세 번째 지점은 보가 본가로 도망쳐왔다는 점이다. 물론 보의 계획이 본가로 돌아가는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후반에 밝혀진, 보가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도망의 종착점이 본가라는 것은 흥미로워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보는 두려웠음에도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가려 했을까? 나는 그 이유가 사랑에 있다고 생각한다. 보는 어머니를 언제나 두려워했지만, 그만큼 사랑했다.

 

어머니는 그런 사랑을 배신한다. 보는 어머니를 사랑한 만큼, 그 사랑을 간직하며 어른이 되어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보의 의지를 꺾어버린 후, 자신의 손아귀에 구속시킨다. 망상 속의 연극에서처럼 어머니를 여의고 어른이 되어 나아가려는 보는 첫사랑 일레인과 재회하여 성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머니는 막아선다. 심지어는 자신은 막았지만 아들이 원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실체를 알려 공포감을 조장, 아들을 더더욱 자신의 손아귀에 틀어쥐려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렇게 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어머니는 아들에게 서슴없이 막말을 날린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아들은 물건이다. 그렇기에 혐오스럽다는, 피붙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절대 아닌 망언마저 내뱉어버리며, 끝내 그럼에도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던 아들의 손에 목이 졸려 생을 끝마치게 된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어머니는 그마저도 예상하여 아들을 끝내 재판장에 세워버린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머니의 본심은 사랑이 아닌 이기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는 동안 힘이 들지만 사랑하기에 끝까지 견뎌내며, 끝내 성장하는 아이로부터 사랑을 돌려받게 된다. 하지만 모나는 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들을 키우는 동안 힘들었던 사실들을 죽음으로서 돌려받고자 한다. 즉, 3시간 동안의 여정은 힘듦을 보상받고자 했던 계획인 것이다. 하지만 모나는 알지 못한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보의 행동은 아이로서는 지극히 할만한 행동이었으며, 보가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했던 이유는 억압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모나는 자신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며, 최종적으로 아들의 모든 순간을 도촬하여 자신을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그렇기에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21세기의 <트루먼 쇼>이며, 보는 언럭키 트루먼이다. <트루먼 쇼>의 엔딩에서 트루먼은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나아가고, 부모와도 같은 크리스토프는 비정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트루먼의 탈출을 용인한다. 그러나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어머니 모나는 아들 보가 독립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차단하고, 결국 보에게는 두려움과, 이기심에 의한 사형 집행만이 남아있다. 물론 보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사람은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상냥한 외과의사 부인은 매수되었지만 보에게 (죽고 싶지 않다면 이기적인 어머니에게) 죄를 그만 저지르라고 이야기해 주었으며, 동시에 보의 운명이 촬영되어 있는 CCTV의 번호를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모성애의 발현으로 인하여 좌초되어 버렸고, 그리하여 보의 운명은 모나의 계획대로 흘러가게 되었다.

 

보가 정신병을 앓게 된 이유는 어머니의 억압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보는 정신병으로 인해 환각 증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두려워하며 도망치고자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병마저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인물이다. 보는 어머니 모나를 사랑하기에 그녀의 수많은 죄를 감내하며 미쳐가는 아이였다. 그러나, 아이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던 어머니는 아이를 뜻대로 조종하며 혐오했고, 누구보다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 이기심을 죄로써 자신의 아이에게 뒤집어 씌우고자 했다. 그리하여 마음속 깊은 곳의 두려움이라는 기저심리는 발현되었고, 아이는 도망쳤다. 그런 모습에 어머니는 분노하여, 도망치는 아이를 기어코 붙잡아 죽이고는 슬퍼한다. 이에 재판장의 제삼자는 무언으로, 극장의 제삼자는 경악으로 답한다. 가엾구나, 위선이 두려워 미쳐버리고 만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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