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가레보시 Jul 11. 2023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

백합 애니메이션의 말로는 어째서 항상 비참한가


나는 편식하지 않는 사람이다. 고수처럼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음식까지 맛있게 먹는다. 영화 역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감상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 있어서는 꽤 편향적인 편이다. 예를 들면, 나는 액션 애니메이션을 그다지 감상하지 않는다. 독창적인 작화와 연출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감상 예정 작품에서 제외한다. 로봇 애니메이션 역시 그러하다. 누군가는 남자의 로망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미가 당기는 장르는 아니다. 물론 <SSSS.DYNAZENON>처럼 나를 홀려버린 뛰어난 로봇 애니메이션이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작품이 예외적이었던 것이리라. 이쯤에서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장르를 하나 공개할까 한다. 나는 백합 장르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백합 로봇 애니메이션은 어떨까?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는 어떨까?

 

TV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 이전까지 나는 건담 애니메이션을 감상해 본 적이 없었다.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명성에 힘입어 감상해 볼까도 했지만, 역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를 감상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백합 장르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미오리네와 슬레타라는 두 소녀들의 관계가 점차 사랑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감상하면서, 나는 행복했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른의 강압을 견디고, 스스로 선택하여 성장해 나가는 아이'라는 작품의 주제가 백합 장르와 융화되는 모습은 이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백합 장르로서의 명작으로만 평가하지 않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러면서도 주제에 어울리는 전투씬들을 통해 건담이라는 시리즈의 정체성을 지켜나갔으니, 훌륭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기회가 될 때마다 <SSSS.DYNAZENON>를 호평하는 이유는, 로봇 애니메이션의 팬들을 위한 웅장한 로봇 전투씬이 작품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리더를 의지하며 정신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이를 통해 다양한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는 등장인물들의 서사가 로봇이라는 장르 속에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SSSS.DYNAZENON>을 지금까지 공개된 2020년대 애니메이션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서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를 호평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어떤 이야기든 그것이 대대적으로 표방되어 있는 장르와 얼마나 잘 어우러져 있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애니메이션을 평가할 때 가장 우선시하는 기준이다. 그럼에도 이야기해두고 싶다.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에 대한 지금까지의 호평은, 어디까지나 1부가 기준이라고.

 

2022년 방영된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의 1부는 호평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잘 만든 작품이었다. 앞서 들려드린 호평 이외에도, 4쿨 분량이었던 기존의 기획을 2쿨 분량으로 압축했음에도 이야기의 손실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호평할만하다. 하지만, 올해 방영된 2부에서부터 호평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압축의 부작용은 나타나버리고 말았고, 상품 판매의 목적으로 쓸데없이 자세하게 묘사된 서브 스토리로 인하여 부작용은 심화되었다.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는 압축으로 인해 급전개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음에도, 대체적으로 이야기를 제대로 끌고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충분한 사전 내용 없이 이전의 갈등이 봉합되고, 우주 의회 연합과 주인공 간의 대립이 종식되면서, 결국 시청자로 하여금 내용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 와중에 구엘과 라우더의 갈등이라는 서브 스토리를 작품 최후반부에 배치하면서 사전 내용을 전개할 시간조차 사라지고 말았는데, 이는 아무리 보아도 건프라라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갈등이 이전에 전개될 여지는 충분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른의 사정과 지금까지의 급전개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메인 스토리가 희생되고 만 듯하다. 물론 구엘과 라우더의 갈등이 재미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쉬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2부가 전부 별로였다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의 클라이맥스 이전까지는 급전개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제대로 전개되었고, 미오리네와 슬레타의 사랑 이야기 역시 제대로 매듭지어지는 등, 백합 장르로서는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이 작품의 메인 타이틀은 <기동전사 건담>이다. 메인을 잃은 바람에 작품은 길을 잃은 것이다.

 

나는 백합 장르를 좋아한다. 하지만, 메인 장르로서 홍보된 것은 어디까지나 건담, 즉 로봇 장르이며, 이는 작품의 정체성과도 같다. 정체성을 잃은 작품은 나머지 구성 요소마저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백합이라는, 주인공들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는 장르까지 퇴색되어, 미오리네와 슬레타의 사랑을 응원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TV 애니에이션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의 1부는 정말 훌륭했다. 백합 장르로서는 최고였으며, 건담이라는 정체성 역시 초심자인 나에게 잘 다가왔을만큼 비판할만한 점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2부는 각본 압축의 문제점을 급전개를 통해 돌려 막은 끝에 작품을 상징하는 건담도, 사이드에 해당하는 백합도 터져버리고 말았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어째서 백합 애니메이션들의 끝은 항상 좋지 않은 것인가? 아쉬움에 끝이 없어, 이제는 미쳐버릴 지경이다!


야마다 나오코 만세!

작가의 이전글 엘리멘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