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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Aug 21. 2023

오펜하이머

잘못된 시대의 고통, 잘못된 역사의 눈가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감독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을 꼽곤 한다. 하지만,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SF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SF 영화를 감상하기는 해도 열광하는 수준은 아닐뿐더러, 이전에 감상한 영화 <인터스텔라>의 내용이 나에게는 가족 영화와 SF 영화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SF가 아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어느 정도 좋아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는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인 <메멘토>와 전쟁 영화인 <덩케르크>를 좋아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들로 꼽는 편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영화 <오펜하이머>는 그러한 두 작품들의 장점만을 흡수하고 발전시켜 탄생한, 그의 최고작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의 신념과 관리자의 책임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로 양분되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이하 오펜하이머)의 심리를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 속에서 오펜하이머의 심리는 개인적인 신념과 관리자의 책임으로 양분된다. 우선, 개인으로서의 오펜하이머는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좌파임과 동시에 애국자였고, 정신적으로는 자신의 행동들이 직간접적으로 낳은 결과에 의해 죄책감을 갖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지지하며 난민들에게 기부금을 보냈고, 공산당을 통해 소련에 정보를 넘길 수 있다는 지인의 권유에 그것은 반역 행위임을 이야기했으며, 자신이 내친 내연녀의 죽음에 슬퍼했고, 자신이 주도한 원자폭탄이 앗아간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 슬퍼하며 자신의 미 원자력 위원회 상임 고문 지위를 이용해 핵의 확산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끄는 관리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개인적인 신념을 숨기고 리더로서의 본보기를 보여야만 했다. 오펜하이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탓과 다름없는 내연녀의 죽음에 슬퍼하며 아내를 껴안고 오열했지만, 동료들의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프로젝트에 필수불가결한 동료들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을 음해하려는 군인들에게 거짓을 고했으며, 원자폭탄의 비극에 슬퍼했음에도 모두의 앞에서 원자폭탄 투하 성공의 축사를 멋지게 연설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펜하이머의 진정한 능력이다. 개인의 신념과 관리자의 책임은 필연적으로 충돌하여 고통을 유발한다. 오펜하이머는 그런 고통을 견뎌냈다. 하지만, 원자폭탄의 연쇄반응은 충돌 지점을 후벼파고, 견뎌낸 고통을 끄집어낸다.

 

정치적 연쇄반응

오펜하이머는 끊임없는 내면의 충돌을 견뎌내며 원자폭탄을 완성했다. 그러나, 원자폭탄의 폭발은 곧 냉전이라는 정치적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2차대전 이후, 미소 양국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경쟁하듯 핵무기를 확산시키기 시작한다. 이 확산이 바로 냉전이라는 연쇄반응의 시작점이다. 또한, 냉전의 공포는 곧 핵전쟁의 공포였던 만큼, 냉전과 핵무기의 확산은 핵폭발에 의한 연쇄반응인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오펜하이머는 핵무기의 확산을 개인적인 신념으로서 저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펜하이머의 모든 것을 난도질하는 데에 크나큰 계기를 제공하고 말았다. 평범한 시대였다면 오펜하이머의 주장은 일정 부분 수용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냉전 시대라는 첫 번째 연쇄반응은 이윽고 메카시즘이라는 두 번째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말았고, 이는 개인적 연쇄반응으로 이어진다.


개인적 연쇄반응

정치적 연쇄반응, 메카시즘은 개인적 연쇄반응으로 이어진 끝에 시기와 대립, 그리고 죄책감의 형태로 오펜하이머의 모든 것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2차대전 이후, 자신이 지휘한 원자폭탄이 냉전과 핵무기의 확산이라는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활동하던 오펜하이머는, 그 과정에서 루이스 스트로스와 여러 방면으로 대립하게 된다. 이로 인해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며 지레 짐작하고는, 메카시즘이라는 정치적 연쇄반응을 이용하여 오펜하이머를 원자력계에서 추방시키고자 치졸한 계획을 세우고, 끝내 자신의 음모가 발각되어 몰락하기는 했지만 오펜하이머를 추방하는 데에 성공한다. 또한, 수소폭탄 개발 찬반 여부를 두고 오펜하이머와 대립한 텔러는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여 그의 보안 인가를 취소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스트로스의 치졸한 계획과 텔러의 불리한 진술의 토대가 안타깝게도 개인의 신념과 관리자의 책임이 충돌하는 지점에 있었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개인의 신념을 강하게 견지하는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관리자로서의 책임 역시 강하게 느끼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두 마음 사이에는 끊임없이 충돌하는 지점이 있었고, 이는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이 충돌 지점은 메카시즘 하에서 결코 그냥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펜하이머에게 있어 두 마음이 충돌하는 지점이란 모순으로, 숨기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순이야말로 물어뜯기에 딱 좋은 사냥감임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개인적 연쇄반응은 일어났다. 스트로스는 메카시즘을 이용하였고, 텔러는 기꺼이 어울려 오펜하이머와의 대립에서 승리하였으며, 오펜하이머의 죄책감은 전부 드러났다.

 

<오펜하이머>의 매력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시대의 피해자로 그리되, 완전무결한 자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온다. 역사 속의 오펜하이머는 분명 시대의 피해자이지만, 개인으로서의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도망쳐 모순을 만들어내는 부도덕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가족과 함께 마음 한편으로 묻어 극복해 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카시즘은 그 개인적인 것을 끄집어내어 오펜하이머와 주변인을 능욕했다. 아내의 일갈과 함께 눈물 흘리며 묻어두었다고 생각했던, 오펜하이머의 부도덕으로 인해 자살한 그의 내연녀는 청문회에서 되살아나 오펜하이머의 죄책감을 자극, 그를 정신적으로 괴롭혔고, 오펜하이머의 부도덕을 마음속에 묻어, 버티고 극복해 나아가고자 노력했던 아내의 모든 것을 철저히 능욕했다.

 

능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메카시즘은 어쩌면 국가에 대한 헌신이라고도 볼 수 있는 관리자의 책임까지도 능욕해버리고 말았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한 오펜하이머의 애국심과 거짓말은 메카시즘의 광풍 아래 그를 옭아매었고, 주변인들을 공격했다. 애국심이 있었기에 소련에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공산주의자 지인의 제안을 거절했으나, 돌아온 것은 공산당원이라는 날조와 공산주의자 지인의 망명이었다. 또한,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하여 신뢰할 수 있는 직원을 자신의 곁에 두고자 내뱉은 거짓말은 불리한 청문회를 이어가도록 만들었고, 자신이 곁에 두었던 직원은 공사판에 나앉았다. 개인으로서의 오펜하이머는 모순적이고 부도덕적인 인물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연쇄반응은 개인적 연쇄반응으로 이어져, 모든 것을 난도질했다.

 

윤리적 연쇄반응

앞서 여러 번 언급했던 것이지만, 오펜하이머는 개인의 신념과 관리자의 책임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고통을 버틴 끝에 원자폭탄의 개발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심지어, 그로 인해 일어난 정치적 연쇄반응과 개인적 연쇄반응마저도 힘겹게 견뎌내어 자신을 음해하던 세력 나름대로의 비겁한 사죄라고 볼 수 있는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상하며 어느 정도 용서하는 모습까지 보였다(여기서 오펜하이머의 아내만은 음해세력을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이 참 가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펜하이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편히 쉴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자폭탄은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신념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윤리적 연쇄반응을 일으켜버렸기 때문이다. 이전의 연쇄반응이 가져온 아픔은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윤리는 오펜하이머의 근본을 파괴해 버린다.

 

오펜하이머가 지휘하여 개발에 성공한 원자폭탄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했고, 이에 오펜하이머는 윤리적으로 고뇌한다. 그러나, 지도자이기에 자신의 개인적 윤리관을 동료들에게 내보낼 수는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아이러니한 윤리적 고통을 오펜하이머의 성공 연설을 기대하는 동료들의 발구름이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연출하여 단숨에 와닿게 만든다. 오펜하이머의 윤리적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지휘한 원자폭탄이 냉전의 단초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고통받았고, 심지어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메카시즘 광풍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기까지 했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망명을 권하지만, 애국심이라는 신념, 윤리관은 오펜하이머의 발목을 잡고 만다. 그리하여, 오펜하이머는 영원한 윤리의 굴레에 빠져 고통받게 된다.

 

<메멘토>와 <덩케르크>, 그리고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를 관람하신 분들이라면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연쇄반응들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며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기에는 힘들지도 모르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끝내 우리는 영화의 주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작들, 그중에서도 <메멘토>와 <덩케르크>라고 생각한다. 즉, <오펜하이머>는 <메멘토>와 <덩케르크>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져와 발전시켜 새롭게 내놓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요소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자신의 전작들인 <메멘토>와 <덩케르크>에서 각각 인물의 조명 방식과 각기 다른 시간대들을 교차편집하는 방식을 가져와 발전시켜 내었고, 끝내 <오펜하이머>라는 걸작을 탄생시켰다고 본다.

 

우선, <메멘토>에서 나타난 인물의 조명 방식은 흑백과 컬러의 대비로 요약할 수 있다. <메멘토>는 이야기 전개에 있어 상당히 특이한 구조를 보이는 영화다. <메멘토>의 이야기 전개는 현재 시간대는 역순으로 진행되고, 과거 시간대는 시간순으로 진행되면서 두 시간대가 맞물리는 지점들을 찾아내 하나의 스릴러가 완성되는 구조를 보인다. 따라서, <메멘토>는 집중하지 않으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과거 시간대를 흑백으로, 현재 시간대를 컬러로 촬영하여 두 시간대를 확실하게 구분 지었고, 이를 통해 관객은 과거의 주인공과 현재의 주인공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두 시간대를 관객 스스로가 맞물리게 만들어, 끝내 꼬여있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흑백과 컬러의 대립으로 인물을 조명, 집중시킨 덕분이다.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에서 이 연출 방식을 다시 한번 사용했다. <오펜하이머> 역시 오펜하이머의 관점은 컬러로, 실제 역사를 따르는 장면은(혹은 스트로스의 관점을 따르는 장면은) 흑백으로 촬영되어 있다. 이를 통해 놀란 감독은 각각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라는 인물을 조명하였고, 관객으로 하여금 두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는 지점을 발견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덩케르크>의 방식이 활용된다. <덩케르크>는 잔교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하루, 하늘에서의 한 시간이라는 각기 다른 시간대들이 끊임없이 교차편집되면서 끝내 영국으로의 귀환이라는 최후의 시간대이자 엔딩으로 맞물리는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이다. <오펜하이머>는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오펜하이머의 관점과 스트로스의 관점이 끊임없이 교차편집되고, 맞물리면서 최후의 주제를 향해 나아간다.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걸작의 반열에 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전의 방식들이 발전하고 합쳐진 끝에 만들어진 영화가 걸작에 반열에 들기도 한다. <오펜하이머>는 후자에 속하는 영화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자신의 전작들인 <메멘토>와 <덩케르크>의 방식들을 발전시키고 합쳐 <오펜하이머>라는 걸작을 만들어내었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창조해 내어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 한편, 이전의 것을 가다듬어 새롭게 만들어낸 끝에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나는 <오펜하이머>를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전자와 후자, 모두에 속하는 감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IMAX와 같은 신기술을 도입하여 놀라운 영화들을 만들어왔음과 동시에, 전작들을 잊지 않고 발전시켜 <오펜하이머>라는 새로운 놀라움을 선사하였다.

 

총평: 전기 영화, 정치 영화, 역사 영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들었던 생각은, 엔딩 장면을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일으킨 연쇄반응이 시작되었다는 엔딩은, 원자폭탄의 존재가 끊임없이 과대평가된 끝에 자신과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과 공포를 안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러한 고통과 공포를 예언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게 의도적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오펜하이머는 분명 모순적이고 부도덕적인 인물이며, 영화 속에서도 그 사실은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의 수모와 엔딩 장면에서의 예언은, 끝내 오펜하이머에게 동정적인 평가를 내리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놀란 감독의 진정한 의도라고 생각한다.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가 모순적이었고 부도덕적이었다는 사실을 연출했지만, 동시에 시대의 피해자였다는 사실까지 연출하여 오펜하이머를 객관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했다. 감독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객관적 해석의 불가능을 시대의 잘못으로 돌려낸다. 트리니티 실험 장면을 떠올려주시기 바란다. 트리니티 실험에서, 폭발은 그 모습이 소리에 선행하고 있다. 나는 이를 원자폭탄은 이미 폭발했지만(모습), 폭발의 연쇄반응을 따라가고 제어하기에 인간은 늦고 있다는(소리) 사실을 표현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원자폭탄의 폭발 이후, 인간은 이를 제어하기는커녕 잘못된 선택만을 연속했다. 냉전이 시작되었고, 메카시즘의 광풍은 수많은 개인을 괴롭혔으며, 누군가는 윤리적으로 고통받았다. 그러한 잘못된 시대 속에서, 오펜하이머가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오펜하이머>는 전기 영화를 넘어 잘못된 정치 이념을 꼬집는 정치 영화가 되고, 잘못된 역사를 담아내어 기억하고자 하는 역사 영화가 되었다. 이러한 장르의 혼합에 도움을 준 것은 더욱 발전되어 활용된 놀란 감독의 전작들에서 나타난 장점들이었다. <메멘토>에서 나타난 인물 조명과, <덩케르크>에서 나타난 제각기 다른 시간대의 교차 편집이라는 장점들은 <오펜하이머>에서 유기적으로 합쳐진다. 오펜하이머라는 주인공을 효과적으로 조명하는 것으로 전기라는 메인 장르의 축을 잡고, 이를 토대로 하여 제각기 다른 시간대 속에 존재하는 정치와 역사가 전부 이어지도록 편집하여 자칫하면 난잡해질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하나로 이은 것이다. 그리하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는 그의 최고작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의 훌륭한 작품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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