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가레보시 Sep 15. 2023

어파이어

영원한 불안 속 잠시의 안식을 위하여


불안은 인간을 정신적으로 고립시킨다. 단 한 번이라도 불안에 빠지고 마는 순간, 인간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어쩌면, 자신조차도.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 <어파이어>는 불안으로 인하여 보지 못하는 것과, 일침을 통한 깨달음 끝에 불안에도 불구하고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불타 사라져 볼 수 없게 된 대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응시되는, 혹은 새로이 불타게 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무리 응시해도, 새롭게 불타올라도 그 대상과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인간의 불안 심리를 파고드는 영화 <어파이어>는 <바바라>, <피닉스>, <트랜짓>, <운디네>로 이어지는 페촐트 감독의 정치적, 역사적인 영화들과는 결이 다른,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의 불안을 되돌아보게 한다.

 

주인공 레온은 글을 쓰기 위해 발트해의 휴양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자동차는 고장 났고,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았던 친구의 별장에는 불청객이 투숙하고 있었으며, 힘겹게 써 내려가는 원고는 반려될 위기에 처했다. 그 와중에 함께 떠나온 친구 펠릭스 역시 자신에게 협조할 생각은 없는 듯 바닷가에서 만난 인명구조원과 마음을 나눈다. 그렇게 레온은 불안해져 간다. 이제 믿을 사람은 자신 뿐일지도 모르고, 사실 자신이 이 원고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지조차도 알 수 없다. 그 와중에 주변인들의 행동과 말투는 자신을 무시하고 비웃는 듯하다. 그렇게 레온의 불안은 점차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의 행동은 오만해 보이기도 하고, 해야 할 일을 미루기 위해 발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행동이 무엇을 야기하는가이다.

 

불안이 초래한 오만과 발악은 레온으로 하여금 주변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레온은 불안함에 주변인들을 밀어낸다. 홀로 상처받으며 밀어내는 행동이 또 다른 상처를 입힌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로. 레온은 불안을 감추기 위해 오만하게 발악한다. 휴양지에 온 겸 함께 수영을 하거나 지붕을 고치자는 펠릭스의 제안에도, 함께 식사를 하자는 나디아와 데비드의 제안에도 '일이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는 오만을 드러낸다. 동시에, 불안하기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뒤로 미루고 싶다는 마음에 나디아에게 '어째서 문학 전공임을 숨겼느냐',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며 발악한다. 그렇게 레온은 주변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곧 레온이 주변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임과 동시에, 아예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안은 이기심을 낳는다.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게 만들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여유를 빼앗는다. 레온을 향한 주변인들의 행동이 정말 그를 무시하는 것이었을까? 영화를 관람한 모든 분들이 아니라고 답하실 것이다. 그다지 인간관계를 쌓지 않는 나조차도, 레온은 상당히 배려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의 당사자인 레온에게 그런 사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좋은 의도로 다가온 사람조차도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레온은 분명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런 잘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대가는 치러지기 마련이다. 불안에 사로잡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은 레온에게는, 깨달음과 함께 그의 주변을 모두 불태울 화재가 다가오기 시작한다.

 

끝없이 불안해하던 레온의 모습을 주변인들은 끝까지 참아주지 못한다. 레온의 무례한 행동에 펠릭스는 진절머리를 내고, 그럼에도 다가가주던 나디아조차도 그를 견뎌내기 힘들어진다. 이에 레온은 역시 믿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악순환은 반복된다. 끝내 레온은 자신을 배려하여 건강 상태를 숨기는 출판사 사장마저 믿지 못한 채, 나디아를 불러 세워 둘이서 날 무시한 것이냐며 화를 낸다. 이제 나디아는 참지 않는다. 끝없이 추해지는 레온을 향해 사장은 암 병동에 입원한 것이라며 조소한다. 그렇게 불안의 세계에는 금이 간다. 덕분에 이제야 레온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윽고 대가는 치러진다. 펠릭스와 데비드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불타 죽었고, 레온은 그들을 똑바로 응시하기 위하여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폼페이의 잔상, 불안의 이미지를 지워내야 한다.


비극 이후에도 레온이 자신의 불안을 떨쳐냈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후 레온은 자신이 겪은 비극을 소재로 한 소설을 집필한다. 레온의 소설은 속죄인 것일까, 불안하고 이기적인 이용인 것일까? 결국 모든 것은 아이러니와 함께 알 수 없어진다. 물의 이미지를 촬영해내고자 했던 펠릭스는 레온의 불안을 상징하는 화재로 인해 불타 죽었고, 레온은 펠릭스의 죽음으로 인하여 불안으로 인한 잘못을 깨달았음에도 여전히 불안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의 앞모습을 응시해야 한다. 나디아는 살아남았다. 펠릭스와 데비드처럼 죽지 않았고, 출판사 사장처럼 시한부를 선고받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앞모습은 펠릭스가 촬영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촬영되지 못한 채, 뒷모습만이 남았다. 결국, 레온은 마지막 불안인 그녀의 앞모습과 직접 부딪혀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레온과 나디아는 서로의 앞모습을 응시한다. 그들의 앞모습, 그동안 유일하게 촬영되지 못한 모습은 카메라라는 영화 예술의 권능을 통해 촬영되고 부딪힌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은 불타오른다. 그것은 사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 혹은 레온 혼자만의 짝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의 사이는 완전히 갈라지게 될 수도 있고, 아예 나디아가 레온을 거부하게 될 수도 있다.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불안해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신용할 수 있을 것인가. <어파이어>는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길을 제시한다. 일단, 응시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작가의 이전글 오펜하이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