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랑하기에 살아있는 존재
에로틱과 모성이야말로 오카다 마리라는 감독, 혹은 각본가를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일 것이다. 영화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은 그 사실을 오카다 마리 감독 스스로가 증명해 내는 작품이다.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은 좋게 말하면 눈물 섞인 감동, 나쁘게 말하면 신파에 의해 가려지고 만 오카다 마리 감독의 전작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진정한 주제를 되찾아주는 작품임과 동시에, 오카다 마리 감독이 각본을 맡았던 나가이 타츠유키 감독의 영화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에 존재했던 결여를 채워 넣고, 왜곡을 바로잡는 작품이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오카다 마리를 각본가가 아닌 감독으로 기억하도록 만들 작품'. 영화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은 항상 구설수에 올랐던 에로틱과 모성이라는 각본가 오카다 마리의 상징을 감독 오카다 마리가 드디어 납득하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이 영화를 통하여 오카다 마리는 감독이 되었다. 전작에서 보여준 가능성들을 더욱 갈고닦은 끝에, 그녀는 전작의 아쉬움을, 이전까지의 아쉬움을 단숨에 지워내 보였다.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와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할 것이 있다. 영화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은 오카다 마리 감독의 전작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와 오카다 마리 감독이 각본을 맡은 나가이 타츠유키 감독의 영화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와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며, 동시에 이 영화들을 발전시킨 작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몇몇 독자분들은 의문을 품으실지도 모른다.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와는 비슷할지 몰라도,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와 비슷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는 눈물에 의해 진정한 주제가 가려지는 영화라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주제를 '사랑에 의해 삶은 주어지고, 그 삶은 미래를 창조하며, 이는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의 주제 역시 이와 같다. 그러나, 주인공들을 모자 관계로 설정하는 바람에 생겨난 눈물에 의하여 주제는 전해지지 못했다.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은 그러한 결점을 보완한다. 이 영화에서 사랑을 나누는 주인공들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이면서도, 그렇지 않다. 환상의 아이들과 현실의 아이들은 분명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부모와 아이의 관계인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재고하게 된다. 하지만, 덕분에 관객은 앞서 이야기한 주제를 명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환상의 아이들은 사랑을 한다. 그 결실인 삶은 사랑이 선사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미래를 창조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전작도 그러했구나'라고. 마키아의 사랑은 아리엘이라는 삶을 낳는다. 그렇게 태어나 살아가게 된 아리엘은 자라나면서 끝없이 방황하게 되지만, 피가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하는 마키아에게서 끝내 사랑을 깨닫는다. 그렇게 아리엘은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에 품어 미래를 창조하고, 사랑을 하여, 새로운 삶을 낳는다. 어머니는 아들의 모습을 영원히 지켜보리라.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은 그러한 주제를 더욱 명확하게 한다. 그저, 후술할 에로틱과 모성의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에 대하여 이야기할 차례이다. 사실 이 영화와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의 유사성은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와의 유사성보다도 높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오는 성장이라는 키워드는 아오이와 신노, 마사무네와 이츠미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깨달음을 얻은 소녀의 실연으로 진정한 사랑이 실현된다는 스토리는 아카네와 신노, 마사무네와 무츠미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한 장소에 갇혀서 나갈 수 없다는 설정, 그 장소가 시골 마을이라는 것까지도 유사하다. 결정적으로, 앞서 이야기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진정한 사랑의 실현을 통하여 모두가 희망을 얻고 미래를 향하여 살아가게 된다는 엔딩까지.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존재한다. 원초의 유무이다. 아카네와 신노를 향한 아오이의 마음은 순수하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한 순수일까? 아이라도 알 것은 안다. 아이는 마음대로 행동한다. 아이는 순수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알고 있는 에로틱을, 알아나가는 중인 모성을 원초적으로 발산한다는 것은 순수한 것이 아닐까?
영화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이 바로 그러한, 진정한 순수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은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를 발전시켜 낸 작품임과 동시에 친근하게 비웃는 작품처럼 보인다. 오카다 마리 감독은 마치 자신이 표현해 내는 순수가 진정성 있다는 것을, 친구이자 동료인 나가이 타츠유키 감독을 향하여 장난스럽게 가르쳐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도,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모자 관계를 부각한 덕분에 전자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었고, 진정한 것은 아니지만, 파릇파릇한 순수를 표현한 덕분에 후자는 마음을 간질일 수 있었다. 다만,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은 그들을 발전시켜 더욱 좋은 작품으로 탄생한 영화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앞선 두 작품을 비판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이 좋은 작품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부터 나는, 앞서 이야기한 에로틱과 모성을 통하여 그 이유를 파헤쳐낼 것이다.
에로틱과 모성
환상의 마을 '미후세'는 영원히 멈춰있다. 마을 사람들은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못한 존재이다. 심장은 뛰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환상의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영원을 즐기고, 누군가는 자신의 마음과 꿈이 영원한 거짓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에 좌절하여 마음에 균열을 만들어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불안해하며 이도저도 아닌 영원을 보낸다. 그러한 영원을 부수는 것은 에로틱이다.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의 에로틱은 마사무네와 무츠미, 그리고 이츠미라는 세 명의 주인공에 의하여 발생하고, 끝내 환상에 균열을 일으킨다. 마사무네와 무츠미는 서로를 좋아한다. 마사무네는 무츠미를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신경 쓰인다'의 방어적인 표현이다. 그 증거로, 마사무네는 무츠미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무츠미 역시 그러했기 때문에 줄곧 지켜봐 온 마사무네를 자신의 파트너로 낙점하여 이츠미의 존재를 가르쳐준다. 그러한 마음은 마사무네의 고백으로 조금씩 진전하며, 끝내 눈밭에서의 키스라는 에로틱으로 실체화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에로틱에는 현실 세계 속 그들의 자식인 이츠미가 끼어든다. 이츠미는 자신을 상냥하게 대해주었던 마사무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이는 조금씩 에로틱으로 발현된다. 그녀는 마사무네에게 달라붙어 적극적으로 신체를 접촉하며, 이에 무츠미가 마사무네에게 분노하기까지 할 정도이다. 그러한 무츠미의 행동은 마치 아이의 성장 과정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 중에는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나는 커서 엄마랑 결혼할 거야.'나 '나는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 같은. 어린 '아이'인 이츠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마사무네에게 끌리며 에로틱을 발현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원한 환상의 존재인 마사무네와 무츠미 역시 이츠미와 같은 어린 '아이들'로 남았다. 따라서, 마사무네의 마음속 에로틱에는 이츠미가 들어올 수 없다. 두 사람은 아이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에로틱으로 발현시키는 과정을 경험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츠미의 감정 변화로 인하여 마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츠미는 마사무네에게 사랑을, 에로틱을 느낀다.
결국, 이츠미는 마사무네와 무츠미의 에로틱을 감지하고 자신의 마음과 미후세 마을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대로라면 미후세 마을의 영원은 끝이 나고, 마을과 사람들은 소멸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떠올려야 한다. 이츠미가 현실 세계 속 마사무네와 무츠미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이츠미가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츠미가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은 모성이다. 여기서 부성이 제외되는 이유는, 이츠미에게 직접적으로 모성을 느끼고 끝내 그녀를 보내주는 사람은 어머니인 무츠미이기 때문이다. 마사무네와 무츠미는 우연히 생긴 균열 바깥에서 나타난 현실을 보고 이츠미가 자신들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 두 사람은 눈밭에서의 키스, 에로틱을 통하여 이어진다. 그리하여 모성은 발현된다. 비록 자신은 환상의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이츠미가 자신과 어떻게든 이어져 있다는 사실과, 그 이어짐을 확실하게 만드는 에로틱. 그렇게 이츠미는 무츠미의 마음속에 잉태된 것이다. 에로틱은 결실을 만들고, 결실은 모성을 발현시키며, 모성은 이츠미와 보폭을 맞춘다.
영원이 계속되는 환상 세계에 존재하는 마사무네와 무츠미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자신들의 결실인 이츠미에게 자신들의 희망을 전해줄 수는 있다. 작중에서 마사무네의 아버지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다. 희망은 깨어나 있는 자가 꾸는 꿈이라고.' 마사무네에게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는, 살아가고 싶다는 꿈이 있다. 이는 무츠미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무츠미는 자신이 살아있지 않은 환상의 존재일 뿐이라고 비관하지만, 그만큼 살아있고 싶다는 꿈을 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 속에 고정된 환상의 세계에서 마사무네와 무츠미, 두 사람의 꿈과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현실로부터 넘어온 이츠미라면 두 사람의 꿈과 희망을 마음에 품을 수 있고, 미래로 나아가 언젠가는 이루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사무네와 무츠미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무츠미를 현실로 돌려보내고자 한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정을 쌓아온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 환상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이츠미에게 있어 무리이다. 여기서, 무츠미의 모성이 드디어 발현하기 시작한다.
무츠미는 떠나기 싫다며 자신들의 이름을 외치는 이츠미를 보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이츠미를 가까이하게 되면 분명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그녀를 멀리했던 나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사무네와의 에로틱을 통해 잉태되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지금의 모습. 그리하여 무츠미는 모성을 발현해 내고, 이츠미를 향하여 손을 뻗는다. '마지막까지 같이 있을게.' 그렇게 무츠미와 이츠미는 현실 세계로 나아간다. 무츠미는 이제 자신의 에로틱으로 잉태한 아이를 세상 밖으로 떠나보내야 한다. 그렇기에 무츠미는 자신의 아이가 헤매지 않도록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미래에 대하여 미리 가르쳐줌과 동시에, 확고하게 선을 긋는다. '마사무네의 마음은 나의 것이고, 나의 마음은 마사무네의 것이야. 마지막 순간에 마사무네는 나를 기억할 것이고. 나 역시 마지막 순간에 마사무네를 기억할 거야.' 하지만, 동시에 위로하고, 격려해 준다. '하지만, 저 앞에는 너를 기억해 줄 사람들이 있어.' 그리하여 이츠미는 무츠미의 마음을 깨달아 스스로 떠나가고, 무츠미는 둥지를 떠나는 아이를 지켜보는 어머니가 된다.
삶과 미래, 혹은 희망의 근원이 되는 것은
이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에로틱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행동이자 삶을 잉태하는 행동이고, 모성은 태어난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마음이다. 그러한 에로틱과 모성은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된다. 사랑, 그것은 행동이자 마음이다. 에로틱은 사랑에 의해 행해지는 행위이고, 모성은 사랑하기에 발현되는 마음이다. 결국, 지금까지 이야기되었던 에로틱과 모성은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하나가 되어, 삶을 잉태하고, 지속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다음의 순서들도 차례대로 이행된다. 사랑에 의하여 지속되었던 삶에는 꿈과 희망이 조금씩 차오르고, 이들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삶의 자산이 된다. 정리해 보자. 아이들의 에로틱은 정체되어 있던 아이의 마음을 움직임과 동시에 좌절, 혹은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눈치챈 아이들, 그중에서도 여자아이의 마음에는 모성이 차오른다. 어머니의 마음을 깨달은 여자아이는 아이의 좌절을 위로하고, 불안에 격려를 보내며, 에로틱을 통해 쌓아 온 꿈과 희망을 전해준다. 그리하여 아이는 미래를 향해 떠나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지켜본다. 사랑이었다.
서로의 세계에서 태동하기 시작하는 삶
마사무네와 무츠미는 서로에게, 자신들의 결실인 이츠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렇게 열차는 알 수 없는 미래로 떠났다. 이제 이츠미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태동시켜 살아갈 것이다. 이제 미후세라는 환상 세계는 그 역할을 끝마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후세는 붕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후세는 영원한 환상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환상 속에서 마사무네와 무츠미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사랑은, 아직 그 결실을 맺을 때가 아니다. 아무리 이츠미를 사랑해 왔다고 하더라도, 이츠미의 정체는 사키로, 두 사람이 속한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즉, 마사무네와 무츠미의 에로틱은 진행 중이다. 이츠미를 미래로 떠나보낸 두 사람은 그 사실을 깨닫는다. 에로틱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행동, 아프다(痛い, 이타이)는 감정은 함께 있고 싶다(一緒にいたい, 잇쇼니 이타이)는 감정. 키쿠이리 마사무네는 사가미 무츠미와 살아있다. 그리하여 시작된다. 에로틱을 통하여 증명된 마사무네와 무츠미의 삶은 희망과 함께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진정한 이츠미가 잉태되고, 진정한 모성이 발현될 것이다.
총평
살아갈 수 없다는 불안과, 이루어질 수 없다는 좌절은 나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나의 존재는 삶에서 배제되어 사라지게 된다. 사랑은 그러한 세상의 법칙에 반기를 든다. 살아갈 수 없다.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살아있다. 지금까지 인간은 삶의 증거를 추적해 왔다. '어째서 인간은 살아있는가?' 오카다 마리 감독은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을 통하여 이 질문에 확신을 갖고 대답한다. '인간은, 사랑하기에 살아있다.' 오카다 마리는 이 대답을 스스로 감독이 되어 전달한다. 하지만, 전작은 미숙했다.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을 이해하는 자가 '살아가는' 이야기다. 마키아는 사랑으로 아리엘을 품는 것으로, 아리엘은 그녀의 사랑을 이해하고 새로운 사랑을 이루는 것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눈물에 의해 주제는 옅어져 아름다운 모성의 이야기로 오독되었다. 이에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은 눈물을 멈추고 사랑의 의미를 들여다본다. 그렇게, 오카다 마리는 감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