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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Sep 26. 2023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

아름다운만큼 더러운, 아이러니의 영화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다 보면 때때로 애니메이션 특유의 정상참작을 이용하여 일부러 묘사를 생략하는 작품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인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그런 경향을 발견하였는데, 똑같이 애니메이션적 정상참작을 이용하였던 <너의 이름은.>과 달리 정상참작에 실패하여 결국 주인공인 스즈메와 소타의 관계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오늘 리뷰할 영화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 역시 <스즈메의 문단속>처럼 애니메이션적 정상참작의 실패 사례로 남을 작품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스즈메와 소타라는 두 주인공의 관계 묘사에서 정상참작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작품이라면,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는 카오루와 안즈라는 두 주인공에게 할당하여야 했을 시간들을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정상참작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작품이다.

 

영화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는 괜찮은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영상과 매력적인 캐릭터 디자인은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고, 평범함을 넘어서 오글거리기까지 하는 러브 스토리마저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연출들은 괜찮은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두 주인공들이 비밀장소에서 불꽃놀이를 올려다보며 살며시 손을 잡는 장면은 정말 뻔한 관계의 빌드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이 슌지 감독의 TV 단막극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의 유명한 후반부 장면을 떠올리도록 만들었다(어디까지나 떠오르기만 했을 뿐이지만).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은 여기서 끝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인 영상을 만들어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결정지어질 수 있는 작품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은 83분, 하스미 시게히코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러닝 타임인 90분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간이다. 물론, 양덕창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처럼 4시간에 달하는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명작으로 남은 영화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그만큼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라는 영화의 러닝 타임이 짧다는 것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러닝 타임이 짧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러 러닝 타임을 줄이는 것은 문제가 된다. 이 영화는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일 것이다.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에는 분명 등장해야 했을 장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제작진들은 그 장면들이 존재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듯 보인다. 제작진의 의도는 들어맞았다. 영화의 내용은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 의도를 이해해 줄 수는 없었다.

 

영화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는 다르게 흐르는 '시간'에 의하여 엇갈리는 사랑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제가 무색하게 제작진들은 작품의 '시간'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작중에는 남주인공 카오루가 자신이 잃어버린 존재를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터널로 뛰어들지만, 끝내 자신을 사랑하는 여주인공 안즈의 마음을 이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여주인공 안즈가 사랑하는 남주인공 카오루를 기다리는 장면 역시 비슷한 분량이어야 했다. 즉, 카오루가 사랑을 이해하는 시간만큼, 안즈가 사랑을 기다리는 시간 역시 묘사되어야 했다. 하지만, 제작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안즈의 시간을 묘사하지 않아도 그녀가 카오루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관객들은 이해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생각은 확실히 들어맞을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제작진들의 생각이 들어맞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의 행동은 영화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나는 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제작진들의 의도로 인하여 사라져 버린 시간들이 나의 뇌리를 스치고 있음을 느끼며 생각했다. 단 몇 분만이라도 좋으니 안즈가 카오루를 기다리는 시간들을 화면 속에 할애하였다면, 이 영화는 꽤 마음을 간질이는 로맨스이자 90분이라는 이상적인 러닝 타임을 가진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동시에 아이러니했다. 제작사 CLAP의 전작이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라는 사실이.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는 그야말로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만드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관객은 영화에 대한 애정을 넘어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90분 이상론에 맞춘 재치 있는 엔딩은 그러한 사랑의 과정에 제대로 된 마침표까지 찍는다.

 

그러나,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 이후에 공개된 영화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는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단숨에 무너뜨려버리는 작품이 되었다. 동시에 시간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가 시간의 소중함을 무시한다는 아이러니까지 보여주었다. 그 아이러니는, 결국 영화의 장점마저도 가려버리고 말았다. 아름다운 화면, 매력적인 캐릭터 디자인, 오글거리는 이야기를 상쇄하는 연출들은 그렇게 먼지가 되어버렸다. 나는 결국 신카이 마코토를 저주하게 된다. <너의 이름은.> 이후로 하나의 공식이 된 뮤직 비디오식 연출과 애니메이션적 정상참작의 영향으로 인해 <여름을 향한 터널, 이별의 출구>라는 영화는 단 하나의 가능성만을 남기고 고꾸라져버리고 말았으니까. 감독 타구치 토모히사에게서 시네마스코프 애니메이션의 희망을 보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아름다운만큼 더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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