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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Sep 26.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삶과 추억, 예술가의 갈망


영화 <바람이 분다>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작으로서 상당히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물론, <바람이 분다>가 별로이거나 잘못된 영화인 것은 아니다. 반전의 메시지와 감독 개인의 밀리터리 오타쿠 성향이 끊임없이 충돌한 끝에 은퇴작에 걸맞은 영화로 만들어지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그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복귀를 선언하였다. 이것으로 마지막일지, 앞으로도 감독 활동이 계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만약 이 영화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작이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은퇴'라는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를 만들어내었다고 말이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추억과 삶을 향한 의지를 융합해 내어, 끝내 마지막을 향한 어떠한 갈망을 담아내는 작품이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작화는 정말 훌륭하다. 진지하게 지금까지 만들어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그러한 작화를 통하여 추억과 의지를 표현하고 융합해 낸다. 그렇다면 추억이란 무엇인가? 의지란 무엇인가? 우선, 추억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다. 주인공 마히토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있다. 그 사로잡힘은 탑이라는 형태로 변화하여 이모이자 새어머니이기도 한 나츠코를 가두어버리는 것으로 마히토가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앞을 향해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마히토는 그 탑에서 이모인 나츠코를 구해내어, 끝내 어머니로서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앞으로의 삶을 향하여 살아가야 한다.

 

탑에서의 모험을 시작한 마히토는 추억, 즉 과거에 대한 기억의 실체이자 어머니의 어린 시절의 모습인 '히미'를 만난다. 마히토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히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자(死者)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에 대한 기억은 곧 죽음임과 동시에, 탑은 저승을 은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명확해진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어머니 히미가 존재하는 저승에 유폐시켜 버린 나츠코라는 생의 의지를 살아있는 자 마히토가 구해내어 살아나가고자 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이. 죽음은 운명,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의 삶은 스스로 창조할 수 있다. 따라서, 마히토는 나츠코라는 생을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저승에서 탈출하여 앞으로 일어날 일,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규정짓고 창조하여야 한다.

 

탑에 남은 히미는 스스로 창조한 미래대로 마히토를 낳고, 정해진 운명대로 불길 속에서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히미의 생이리라. 그렇다면, 마히토와 나츠코 역시 그리해야 한다. 마히토와 나츠코는 서로를 가족으로서 받아들이고, 운명이 다가오기 전까지의 생을, 미래를 창조하여야 한다. 그런 사실을 암시하듯 영화는 앞으로의 펼쳐질 도쿄 생활을 열린 결말로 끝맺음으로서 앞으로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게 될 마히토의 변화를 암시한다. 나는 열린 결말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감독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하고 관객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작품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만큼은 열린 결말로 끝나야만 한다. 운명이란 저마다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생만큼 운명은 존재한다. 따라서, 모두의 운명을 정해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마히토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의지, 삶을 향한 의지를 손에 넣었다. 그렇기에 돌조각들로 위태롭게 쌓인 탑이 무너지고 말았음에도 개의치 않을 수 있다. 지나간 과거와 기억을 상징하는 돌조각들이 무너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히토를 사로잡고 있던 어머니 히미의 죽음이라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히토는 분명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슬픈 과거와 기억을 견디고 견뎌, 언젠가 꿈에 나타나주기를 바라보는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꿈이다. 꿈이야말로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주인공 마히토가 탑에서의 모험을 통하여 슬픈 과거와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고, 끝내 죽음의 탑을 무너뜨려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로까지 이어내는 과정에 꿈이라는 마침표를 찍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본인의 과거와 기억, 추억을 꿈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은 서서히 머릿속에서 잊힌다. 하지만, 때때로 불현듯이 떠올라 추억이 되고, 삶을 위한 동력과 의지가 된다. 마치 일련의 모험으로 성장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결국 어린아이이기에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마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인공 치히로처럼. 하지만, 그때의 모험과 성장은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올라 치히로의 삶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마히토 역시 그러하다. 돌조각을 주워왔기에 탑에서의 기억을 유지하는 마히토도 언젠가 그 기억을 잊을 것이다. 그러나, 마히토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분명 남아있을 것이고, 언젠가 불현듯 떠오를 것이다. 그 순간 마히토는, 자신이 추억을 되새기고 의지를 갖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더욱 마음을 다잡게 되리라.

 

돌조각으로 쌓은 탑, 저승이 무너져내려도 현실 세계, 이승은 유지된다. 생은 저승이 아닌 이승에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나가도 인간은 버텨낸다. 어머니를 잃은 마히토 역시 그리하여 살아간다. 그리움의 지배는 인간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든다. 그렇기에 인간은 지나가버린, 그리운 추억들이 언젠가 꿈에 나와주기를 바라며 지나간 시간들에 몸을 맡기고, 다가올 운명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82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삶은 어느덧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삶보다도 죽음을 더 가까이하고 있는 그는 이제, 꿈결과도 같은, 지나가버린 추억의 어린 시절을 세밀하게 애니메이팅하여 끝내 다가올 마지막이라는 운명을 창조하려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알 수 있다. 자신의 창작혼을 죽음 앞에서조차 지속시키겠다는,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예술가의 갈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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