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의 미와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반권위주의
야마모토 에이이치 감독의 영화 <슬픔의 벨라돈나>는 꽤 난해해 보이는 작품이다. 장르적으로 아방가르드를 표방하고 있는 영화이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나는 와타나베 아유무 감독의 <해수의 아이>와 후루카와 토모히로 감독의 영화 <극장판 소녀 가극 레뷰 스타라이트>를 감상하며 아방가르드 장르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내 생각에, 아방가르드 영화의 해석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첫 번째는 연출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각본으로는 스토리와 주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단점을 연출로 극복한 <해수의 아이>가 이에 속한다. 두 번째로는 각본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각본을 통해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여야 연출을 이해할 수 있는 <극장판 소녀가극 레뷰 스타라이트>가 이에 속한다. 그렇다면 <슬픔의 벨라돈나>는 어느 쪽일까?
각본: 주제
<슬픔의 벨라돈나>는 후자에 더 가까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난해한 아방가르드 연출이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도, 각본에 집중하기만 한다면 작품의 주제와 연출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슬픔의 벨라돈나>의 주제는 무엇일까? 페미니즘적 반권위주의, 이것이 바로 <슬픔의 벨라돈나>의 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슬픔의 벨라돈나>의 주제는 반권위주의이며, 이를 꾸며주는 사상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페미니즘이라기보다는 반권위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슬픔의 벨라돈나>는 히피층의 공감을 노리고 만들어졌다는 스기이 기사부로의 인터뷰에서 확실해진다. 히피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 및 68 운동 세력의 영향을 받은 문화 사조를 이르는 말이니, 반권위주의와 밀접하게 닿아있음이 당연하다.
이러한 반권위주의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영주와, 악마와 계약하여 마녀가 되었음에도 사람들을 돕는 잔느의 대비와 대립으로 나타난다. 영주는 오프닝부터 권위를 통해 잔느의 처녀성을 상실시켜 신혼 가정을 파탄낸다. 이후에도 전쟁을 위해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착취하며 영지를 사실상 파탄 직전까지 몰아가기까지 한다(여기서 반전주의를 견지하는 히피층의 공감을 노렸다는 것이 나타난다). 반면, 잔느는 권위에 복수하기 위해 마녀가 되었음에도 정작 우리가 알고 있는 마녀의 스테레오 타입인 악당 같은 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통해 권위로 인하여 무너져가던 가정을 되살리려 하고, 착취와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돕기까지 한다. 덕분에 잔느는 민심을 얻게 되고, 영주와의 대립은 시작된다. 우리는 그 대립 과정에서 페미니즘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반권위주의의 상징이 된 잔느는 권위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은 끝에 붙잡혀 화형 당하고 만다. 이는 끝내 반권위주의는 패배하였고, 권위주의가 승리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형을 지켜보는 여인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잔느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장면을 통해 권위의 승리는 허울뿐인 것이 된다. 잔느는 세상을 떠났지만, 권위를 농락하며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잔느를 향한 감사와 존경은, 언젠가 권위주의를 향한 대항으로 번져나갈 것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여인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잔느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장면은, 언젠가 권위주의에 대항하게 될 사람들의 마음을 형상화한 장면임과 동시에, 영화의 엔딩인 혁명을 이끄는 여인의 모습과도 연관지어 페미니즘적 요소를 끌어안는 장면이다.
이제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나는 <슬픔의 벨라돈나>를 페미니즘으로 꾸며진 반권위주의 영화라고 이야기했다. 분명 이 영화는 페미니즘이 메인으로 드러나는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사상이 끊임없이 가리키며 달려나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한다면, 결국 페미니즘은 메인이 아니게 된다. 분명 잔느는 여성이다. 또한, 잔느에게 감명받아 그녀의 얼굴을 하게 되는 것 역시 여성들이다. 하지만, 잔느가 상대한 이들은 여성의 인권만을 핍박한다기보다는 모든 백성들을 핍박하는 권위주의 세력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보다도 반권위주의가 우선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을 핍박한 영주와 부인은 반권위주의의 화신 잔느에게 여러 번 농락당한 끝에 그녀를 화형시켰지만, 잔느의 의지를 계승한 사람들이 언젠가 혁명을 일으키리라는 반권위주의적 사실이 페미니즘으로 꾸며졌을 뿐이다.
연출: 아방가르드
<슬픔의 벨라돈나>는 아방가르드 애니메이션 영화로, 충격적으로 연출되어 있는 순간순간의 이미지들이 인상 깊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반면, 그 이미지들이 애니메이션의 동적인 요소들을 일정 부분 포기한 덕분에 연출될 수 있었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슬픔의 벨라돈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애니메이션이라는 플랫폼이 아니라면 그려지지 못했을 이미지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 예시로, 작중 초반에 잔느가 영주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실사로는 촬영해내지 못할 듯한 아방가르드적인 이미지가 부분적으로 폭발한 애니메이션의 동적인 요소로서 그려져 있다. 이는, 잔느가 권위주의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뇌리에 충격적으로 박히도록 함과 동시에 반권위주의라는 주제를 처음부터 이해하고 감상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만든다.
이를 통해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슬픔의 벨라돈나>는 애니메이션의 동적인 요소, 즉 움직임을 표현하는 작화가 일정 부분 제한되어 있기에 아쉬운 작품이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확실하게 각인되어야 할 이미지만큼은 확실하게 동적인 요소로서 그려져 있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슬픔의 벨라돈나>는 오직 애니메이션만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가 되었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슬픔의 벨라돈나>의 아방가르드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의 주제를 아방가르드 연출로 납득시킨 <해수의 아이>와 소녀들의 마음을 상업적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길로서 풀어낸 <극장판 소녀가극 레뷰 스타라이트>의 아방가르드가 마음에 더 와닿았다. 하지만, 아방가르드 애니메이션의 시초가 되어 더 좋은 작품들이 만들어질 계기가 된 <슬픔의 벨라돈나>의 업적이 부정되지는 않으리라.
사견
<슬픔의 벨라돈나>는 훌륭한 영화다. 아방가르드로서 반권위주의라는 주제를 페미니즘이라는 부재료와 함께 잘 녹여내었음과 동시에, <소녀혁명 우테나>에 영향을 주어 <극장판 소녀가극 레뷰 스타라이트>와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로 이어지는 계보를 창조했다. 그럼에도 나의 보수성은 발동했다. 영화에 대한 비판이 아닌, 혁명가는 언제나 자신의 시대를 떠올려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보수적이기에, 혁명과 페미니즘은 기존의 체제를 급격하게 파괴하여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고 마는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못된 권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그런 사상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히피 시대의 끝자락에 공개된 <슬픔의 벨라돈나>는 잘못된 권위가 판치고,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중세 유럽이 히피 문화와 융합하여 탄생한, 시대상에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지금의 우리는 잘못된 권위에 대항하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지는 시대를 살고 있는가? 한 여성이 사랑하는 상대와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권위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시대를 살고 있는가? 물론, 권위주의는 경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가 폭주하고, 이에 두려워하며 눈감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자유를 잃고 깜깜했던 4공과 5공의 시대를 다시 살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반권위주의와 페미니즘이 오남용 되는 사회 역시 두렵다. 반권위주의를 가장한 새로운 권위의 출현이, 여성 해방의 이름으로 자유가 억압되고 마는 세태가 두렵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는 깜깜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지금의 시대는 반드시 무너뜨려야만 하는 잘못된 시대인가. 고쳐나갈 수는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