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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Aug 05. 2023

이니셰린의 밴시

교차하는 거시사와 미시사


20세기 초반 아일랜드의 역사는 상처의 역사였다. 영국의 식민 지배라는 치욕으로 생겨난 상처는, 독립을 이루기 위한 영광스러운 투쟁의 상처를 지나, 끝내 분열과 동족상잔의 상처로 이어져 곪아버리고 말았다. 이번 글에서 이야기할 마틴 맥도나 감독의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는 얼핏 보면 개인적인 역사를 냉소적인 코미디로 풀어나가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일랜드라는 나라, 혹은 섬이 겪어온 역사가 투영되어 있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는 영국과의 조약을 둘러싸고 각각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린 자유국과 IRA 간의 내전이 벌어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마틴 맥도나 감독은 언제 터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아일랜드 섬의 마지막 상처가 곪아가는 과정을 웃기면서도 섬뜩한 두 친구의 절교라는 개인적인 역사와 훌륭하게 융합시킨다.

 

그렇다면 아일랜드의 상처의 역사와, 두 친구의 절교라는 개인적인 역사는 어떻게 공통분모를 갖고 융합되는 것일까? 나는 무의미를 견지하려는 마음과 무이유의 이유를 찾으려는 마음의 대립이 두 역사의 공통분모라고 생각한다. 작중에서 콜름은 파우릭에게 자네와 함께하는 삶에서는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자네가 싫어졌다는 말과 함께 절교를 선언한다. 이에 파우릭이 이유를 물으며 갈등은 시작된다. 파우릭은 이유라는 이름으로 정답을 요구하고, 콜름은 끊임없이 무의미를 선언한다. 결국 감정의 골만이 깊어질 뿐이다. 자유국과 IRA의 관계 역시 이에 대입할 수 있다. IRA는 영국과의 조약이 무의미함을 선언했다. 자유국은 그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원하는 답은 들을 수 없었다. 자유국은 이유라는 이름의 조약 비준을 요구했고, IRA는 끊임없이 조약의 무의미함을 선언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무의미를 견지하는 콜름과 무이유의 이유를 찾으려는 파우릭이 갈등하기 시작하면서, 마을 역시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한쪽은 콜름의 곁에 서고, 다른 한쪽은 파우릭의 곁에 선다. 동시에,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은 오빠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본토로부터 온 일자리 제의를 승낙하여 양쪽으로 갈린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난다. 이 역시 아일랜드 내전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일랜드 역시 자유국과 IRA의 내전 속에서 조약 지지파와 조약 반대파로 갈려버렸고, 동시에 두 파벌의 갈등을 피해 조국을 등지고 외국으로 떠나버린 이민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종합해 보았을 때, 마틴 맥도나 감독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게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IRA와 자유국, 이민자는 각각 콜름, 파우릭, 시오반의 역할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서, 콜름과 파우릭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져 가지만, 아직까지는 선을 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파우릭의 콜름과의 관계를 위해 거짓말로 음대생을 마을에서 내보냈다는 사실이 들통나며 그 선은 사라진다. 콜름은 경고했던 대로 자신의 손가락을 전부 잘라 버렸고, 이로 인해 파우릭의 당나귀가 죽게 된 것이다. 결국 파우릭은 분노하여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른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아일랜드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와 맞닿아 있다. 파우릭의 거짓말은 자유국 측의 조약 지지 선언으로 해석할 수 있고, 콜름이 손가락을 잘라 던져 것은 조약 지지에 맞선 IRA의 포 코트 점거 봉기와 더블린 전투로 해석할 수 있으며, 파우릭이 불을 지른 것은 IRA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내전에 돌입한 자유국의 공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어째서 파우릭은 콜름의 개를 살려주었으며, 동시에 어째서 도미닉이 죽은 것인가?'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최소한의 민족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우릭은 개에게는 잘못이 없기에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른 후 개를 데려가 돌본다. 이 행동은 상처받았지만, 동시에 잘못을 저지른 파우릭에게 남은 최소한의 양심이다. 감독은 그 양심을 조명하여, 동족상잔의 비극 속 아일랜드인들에게도 최소한의 민족애가 남아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상처는 지울 수 없다. 그 상처는 당나귀의 죽음과 도미닉의 죽음이다. 당나귀의 죽음은 콜름의, IRA의 잘못이다. 반대로, 도미닉의 죽음은 파우릭의, 자유국의 잘못이다. 파우릭의 편을 들어온 도미닉은 파우릭의 거짓말에 실망하여 시오반에게 사랑을 고백한 후 자살인지 사고인지 모를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콜름과 파우릭의 갈등은 파우릭의 방화 이후 소강상태를 맞이한다. 아일랜드 내전 역시 자유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갈등은, 아일랜드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못하고 곪아버렸다. 곪은 상처는 건드리는 순간 터져버린다. 그렇기에 콜름과 파우릭은 영원히 흔들리는 관계를 지속할 것이고, 아일랜드는 터져 나오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 역사는 한 나라의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인간들의 것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교차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갈림길과 한 쌍의 생명체들의 이미지, 그리고 켈트 신화를 접목하여 아일랜드의 거시적인 역사와 두 인간의 미시적인 역사가 교차되는 지점을 포착한다. 이어서 살며시 질문한다. ‘상처는 아물었을까?’ 지금도 전쟁을 지속 중인 반도의 나에게는, 소름 돋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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