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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Oct 13. 2023

목소리의 형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너에게 전할 수 있다면


야마다 나오코는 인간의 감정과 관계를 통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감독이다. <케이온!>에서 표현되는 학창 시절과, <타마코 러브 스토리>에서 표현되는 첫사랑 등이 바로 그 예시이다. 그러나,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세 번째 영화 <목소리의 형태>는 그러한 불문율에서 벗어나 있다. 영화 <목소리의 형태>는 수단이 목적으로 변모하는 작품이다. 관객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주제를 <목소리의 형태>에서 찾아볼 수 없고, 인간의 감정과 관계라는 표현의 도구가 새롭게 주제로 거듭나는 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영화 <목소리의 형태>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이전의 영화들과, 이후의 영화들의 사이에서 가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목소리의 형태>를 통해 감정과 관계라는 자신의 수단을 재인식하고, 발전시켜 차기작을 향해 발산할 수 있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의 형태>는 차기작을 위한 프로토타입으로만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목적이 된 수단

야마다 나오코 감독에게 감정과 관계란 수단이다. 그녀는 감정과 관계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표현해 왔다. 하지만, <목소리의 형태>는 그렇지 않다. 언제나 수단이었던 감정과 관계가 목적으로 변모해 있다. 이는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예시를 들어보자면, 가위로 종이를 오려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는 것과, 가위를 꾸며서 전시하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즉, 가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종이를 오려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위 자체를 꾸며서 전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가위의 예시는 목적이 된 감정과 관계에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인간의 감정과 관계를 화면 안에 우선 연출한 다음, 이를 수단으로 활용하여 최종적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주제, 목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즉, 최종적으로는 수단이라 하더라도 일정 단계까지는 목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전까지의 우려는 반대가 된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감정과 관계를 먼저 연출한 다음, 최종적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주제를 표현한다. 하지만, <목소리의 형태>에는 그러한 최종 단계가 필요 없다. 그렇다면,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오히려 편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목적이 되어버린 수단인 감정과 관계만을 제대로 연출하기만 한다면, 영화의 주제까지 한 번에 표현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목소리의 형태>는 수화가 주요 키워드로 작용하는 작품이다. 이는 손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관계를 연출하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에게 있어 운명이자 행운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물 만난 물고기가 되어 감정과 관계를 화면 안에 나타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연출 방식을 활용한다. 시그니처 연출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손과 다리의 클로즈업은 물론, 영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만큼 사용해 왔던, 애니메이션보다는 실사 영화에 가까운 카메라 활용법 역시 전작들보다 더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 안에 녹여낸다.


그중에서도 진일보한 연출이라면, 플래시백과 문자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사실 플래시백의 경우 전작 <타마코 러브 스토리>에서 활용된 전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의 플래시백은 필름의 힘을 빌린 것이었다. <타마코 러브 스토리>는 필름과 레코드라는 물건을 통해 영화와 음악에 대한 사랑을 타마코와 모치조의 사랑과 동치시키는 영화이기 때문에,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필름의 힘을 빌어 플래시백을 필름이 상영되는 것처럼 연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의 형태>에서는 그럴 수 없고, 앞으로의 작품에서도 그럴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그렇기에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목소리의 형태>를 기회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플래시백 연출을 완성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새롭게 시도된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플래시백은 마치 환상과도 같은 감상을 주면서도, 그것이 명확하게 작품 속의 과거에서 일어났던 일임을 인지시킨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쇼야의 어머니가 아들의 자살 시도를 질책하는 장면의 플래시백과, 곧바로 등장하는 등교 장면의 플래시백을 들 수 있다.

 

전자의 플래시백은 쇼야가 자신의 자살 시도를 질책하는 어머니가 갖고 있는 귓불의 흉터를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피를 흘리면서까지 귀걸이를 쥐어뜯었던 과거와, 자살 시도를 질책하는 현재. 어머니의 두 행동은 다른 행동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들을 사랑하는 모성을 통해 같아진다. 그러한 진의를 깨달을 수 있도록 두 행동을 오버랩시키는 것이 바로 환영, 혹은 꿈처럼 스쳐 지나가는 플래시백이다. 후자의 플래시백은 그러한 어머니의 질책을 들은 쇼야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시작된다. 꿈처럼 스쳐 지나가는 어머니와 눈물과, 어린 시절의 쇼코도, 다시 만난 쇼코도 흘린 눈물. 그 눈물을 흘리게 만든 자는 누구인가? 아, 나였구나. 결국, 쇼야는 아래를 보며 걸을 수밖에 없다. 앞을 바라보게 된다면, 다시 상대를 상처 입히고 눈물 흘리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떠오르니까. 후자의 플래시백은 트라우마다. 이에 쐐기를 박듯이 시마다는 말한다. '저 녀석은 가해자니까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아.' 그렇게 쇼야는 모든 소통을 차단하고 고립되었다.

 

이것이 바로 야마다 나오코 감독이 완성한 플래시백이다. 그녀는 작품 속에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를 환상이나 꿈처럼 연출하여, 플래시백의 대상과 관객으로 하여금 과거의 상황에 감정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이는 당연하게도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야기한 감정과 관계의 연출에도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문자의 활용은 이를 조금 변형하여 만들어진 연출이다. 청각장애인은 꿈에서 자막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이를 연출적으로 활용했다. 영화의 후반, 쇼코가 꾼 쇼야의 죽음을 예지하는 듯한 악몽에서 쇼야의 대사는 자막으로 처리된다. 동시에 꿈속의 쇼야는 저 멀리 떠나려는 듯 작아지고, 멀어진다. 그렇게 악몽 속에서 문자가 나타난 순간,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불길한 암시와도 같은 꿈에서 깨어난 쇼코는 그대로 뛰쳐나가고, 쇼야를 만나 해후를 푼다. 이 장면에서 나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이 불길한 문자를 나열해 집중력을 한순간에 끌어올리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목소리의 형태>를 통해 플래시백과 문자의 활용은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차기작 <리즈와 파랑새>에서 완전히 빛을 발한다. 미조레가 바라보았던 노조미의 모습은 아름다운 환상과도 같은 플래시백을 통해 펼쳐지며 관객으로 하여금 미조레의 마음을 눈치챌 수 있도록 만들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목소리의 형태>에서는 그다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문자의 활용은 비로소 완전한 감독의 것이 되어 마지막 암전과 함께 미조레와 노조미의 관계를 올바른 위치로 되돌려놓는다. 영화 <케이온!> 리뷰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진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의 과정과 결과에서 얻은 경험을 확실하게 습득하고 다음의 과정에서 활용하여, 더욱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말이다. 그러한 능력 덕분에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케이온!>을 통해 <타마코 러브 스토리>를, <목소리의 형태>를 통해 <리즈와 파랑새>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부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능력이 오랫동안 빛을 발하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한다

<목소리의 형태>가 한국에 공개된 2017년부터 2023년이 된 지금까지, <목소리의 형태>에 대한 다양한 비판을 들어보았다. 대부분 일리 있는 비판들이었지만, 단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비판이 존재했다. <목소리의 형태>는 피해자를 나락으로 빠뜨리고, 가해자를 미화하는 영화라는 비판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애초에 <목소리의 형태>를 '피해자와 가해자가 등장하는 학교폭력 영화' 등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목소리의 형태>를 '우리는 서로를 믿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자면, <목소리의 형태>는 서로의 관계를 복원하고 함께 나아가자고 외치는 영화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쇼코와 쇼야를 각각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인 관계로 두고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분법적인 관계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처음이 아닌, 그 관계를 올바르게 재정립하여 함께 손을 맞잡는 것이 때문이다.


따라서, <목소리의 형태>의 주제는 화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나아간 지점까지를 바라보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는 소통, 소통으로서 이루어내는 화해, 화해 끝에 미지의 삶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결심. 이것이 바로 <목소리의 형태>의 주제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소통으로, 이는 주제를 마지막까지 끌고 가기 위한 키워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통의 창구를 굳게 닫고 있었던 인물들의 모습을, 소통의 창구를 열어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닫아두었던 인물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좇아야 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영화 <목소리의 형태>를 주제를 관통하는 키워드인 '소통'을 각각 쇼야의 시선에서, 쇼코의 시선에서, 그리고 우에노와 카와이의 시선에서 해부할 것이다. 이 해부를 통하여 우리는, 인간은 어째서 타인을 경계하고 자신을 방어하는지, 도를 넘은 무분별한 경계가 초래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어떤 불통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조금씩 경계를 풀어나가며 타인을 향해 다가가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시다 쇼야는 쾌활한 초등학생이었다. 반의 분위기를 주도했고, 그런 모습에 호감을 표시하며 동조하는 우에노 나오카 같은 여자아이도 있었다. 그러한 이시다 쇼야는, 전학생 니시미야 쇼코라는 관심대상에게 성격과 나잇대에 맞는 관심을 표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쇼야가 쇼코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처음은 폭력이 아닌 관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쇼야의 시작은 관심 있는 여자아이에 대한 어린 남자아이의 짓궂은 장난이었다. 처음의 쇼야는 짓궂은 장난과 함께 쇼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자아이들의 무리에 섞여들지 못하는 쇼코에게 '더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다른 애들이 싫어하지 않겠어?'라며 조언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청인과 농인이라는 차이를 뛰어넘지 못한 채 장난 섞인 조언에 머물러버리고 만 순간, 쇼야와 쇼코의 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된다. 쇼코는 쇼야에게 수화로 자신의 진심을 전달한다. 하지만, 수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쇼야는 불이해를 쇼코의 존재로까지 확대하고 만다.

 

그렇게 쇼야의 삶 역시 이해받지 못하게 된다. 결국 심판의 때가 찾아왔을 때, 쇼코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끝내 배척해버리고 만 쇼야에게는 가담자들의 배신이라는 벌이 내려진다. 쇼야는 억울하지만, 억울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아이들이 함께 쇼코에 대한 이지메에 가담했다고 하더라도, 겉보기에 그 사실을 어른들에게 들켜 반이라는 집단을 와해시키려 하고 있는, 주도적으로 가해를 저지른 자는 쇼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쇼야는 고립되고, 소통의 창을 닫아버린다. 쇼코는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쇼야에게도 손을 내밀어준다. 이는 결코 같은 처지에서 비롯된 동정이 아닌, 상냥함이라는 본성에서 비롯된 소통의 기회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떨쳐낸 쇼야는 소통의 창을 닫고 고립된다. 닫혀버린 소통의 창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소통의 문을 열고자 했을 때도, 쇼야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불통을 고수한다. 초등학생 시절의 친구들과 쇼코를 한데 모으면 어떻게든 되리라고 생각하며, 들리지 않을 뿐, 전부 이해하는 쇼코를 무시한다.

 

쇼코는 친구들을 찾는 쇼야에게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그저, 상냥하기에 자신을 다시 찾아와 손을 내밀고, 유일하게 다시 만나고 싶었던 친구 사하라를 찾아준 쇼야의 행동에 호감과 함께 따라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상냥함이 쇼코의 소통을 가로막는다. 이후의 갈등은 전부 쇼야의 불통으로 인해 일어났을 뿐인데도, 너무나 상냥한 아이인 쇼코는 자신의 존재가 쇼야와 친구들의 재회를 돕기는커녕 분열만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쇼코는 그 생각을 숨겨두고 있다. 결국, 쇼야는 진정한 쇼코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쇼코는 자신의 탓을 늘려간 끝에 자기혐오에 빠지며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리라고 믿게 된다. 여기서 가장 슬픈 것은, 쇼코가 그런 잘못된 깨달음을 얻어버린 순간, 드디어 자신의 진심을 표정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쇼코는 늘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죽음을 결심했을 때의 그녀는 비로소 만족의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모두의 관계를 비극으로 이끌던 불통은, 쇼코의 자살미수라는 사건을 통해 해소되기 시작한다. 쇼야가 입원하자 우에노는 쇼코를 찾아가 폭력을 휘두르고, 이에 쇼코의 어머니마저 폭력을 휘두른다. 이를 중재하는 것은 쇼야의 어머니다. 그녀는 두 사람의 싸움을 중재한 후, 쇼코를 향해 다가가, 미소 지으며 눈물 흘린다. 미소와 눈물, 우리는 때때로 양쪽에 상황에 동시에 처해버릴 때가 있다. 슬픈 일을 마주했음에도, 상대방을 향해 미소 지으며 훌훌 털어버려야 할 때가 있다. 쇼코는 쇼야의 어머니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달으며 눈물 흘린다. 그리하여 쇼코는 모두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해내어, 모든 것을 되돌리고자 한다. 여기서 장애의 벽은 허물어진다. 필기구로, 성대로, 수화로, 쇼코는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제목이 <목소리의 형태>인 이유다. 목소리는 소통의 도구이다. 하지만, 인간은 목소리만으로 소통하지 않는다. 목소리의 형태는 끝없이 변화한다. 하지만, 의지만 있다면 어떤 변화에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

 

이제 쇼야와 쇼코가 서로의 마음을 전할 차례다. 쇼야는 쇼코의 자살미수를 통해 자신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불통이 쇼코를 위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도리어 쇼코에게 부탁한다. 내가 살아가는 것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쇼야는 죄책감과 자기혐오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따라서, 혼자서는 지금의 삶을 버텨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 사실을 타인에게 털어놓고, 도움을 구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런 쇼야의 부탁에 쇼코는 자연스레 웃는다. 자살을 시도했을 때의 만족과는 다른, 친구로서의 장난스럽고 자연스러운 웃음이다.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있다. 쇼코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을 때, 그녀의 고백은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쇼코와 쇼야가 이전의 가식적인 대화에서 벗어나 진정한 친구로서 대화를 시작했던 순간, 그제야 쇼코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사랑을 시작한 쇼코는, 여전히 아래를 바라보는 쇼야의 손을 잡아줄 수 있게 된다.

 

영화는 이후 쇼코와 친구들의 격려로 앞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쇼야가 오랜 시간 동안 닫아두었던 눈과 귀를 다시 여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아래를 바라보며 귀를 막았던 초반부의 장면을 회수하며 소통의 의미를 강조한 셈이다. 하지만, 나는 사랑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주제의 근원이 되는 소통의 시작점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보다 더 드러나게 만드는 것은 쇼코와 우에노, 카와이의 관계이다. 우에노는 솔직한 아이이다. 그렇기에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는 관람차에서 쇼코를 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우에노는 네가 싫다는 진심을 쇼코에게 또박또박 전달하고, 쇼코의 자기혐오도 전부 들어준다. 하지만, 이기심은 결국 소통을 폭력으로 미끄러뜨린다. 카와이는 나르시시스트다. 그렇기에, 자신을 지적하는 상대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진심으로 자신은 결백하다고 믿는다. 이는 우에노와는 다른 모습의 이기심이나 다름없다. 쇼코는 그 사이에서 상처를 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쇼코는 동시에 두 사람의 모습을 본받는다.

 

'본받는다니, 무엇을?'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도해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우에노와 카와이의 행동은 단점임과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다. 우에노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야 한다는 과격한 제약이 달려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아이이다. 또한, 카와이는 나르시시즘으로 흘러가 타인을 배척하고 자신만을 생각하기는 하지만,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이다. 앞선 단점을 제외하고 보면, 분명 본받을만한 장점이다. 만약 쇼코가 이들을 적절하게 본받는다면,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며 상대에게서 자신의 진심을 똑바로 전달하고, 상대의 이야기 역시 귀 기울여 듣는, 올바른 소통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쇼코는 그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시작으로, 쇼코는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며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다는 진심을 모두에게 전달했고, 앞을 바라볼 수 없다는 쇼야의 고백을 이해하며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닫혀있던 쇼야의 눈과 귀는 다시 열린다.

 

인간은 자신과 내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을 경계하고 이기심을 내뿜는다. 쇼야가 배신당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지만, 붕괴라는 두려움에 영원히 서로 마주하지 않고 벽을 세우기만 할 뿐이라면, 인간은 결국 혼자가 되어 쓸쓸히 죽고 말 것이다. 서로의 이야기만 토해내며 해산되고 만 재회의 모임처럼. 우리는 마주 보아야 한다. 우산을 들추어 쇼야와 마주 보았던 유즈루처럼, 우산을 씌워주며 우에노와 마주 보았던 쇼코처럼 미지의 상대를 향해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살 수 있다. 모두가 서로를 마주 보기 전까지, 유즈루의 카메라는 언제나 죽음의 존재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쇼코가 자신을 사랑하며 상대를 마주 보고, 상대 역시 이에 응해주었을 때, 비로소 쇼야는 되살아나고, 유즈루의 카메라 역시 하늘을 나는 새, 삶의 존재를 응시한다. 하늘을 나는 새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성장의 은유이다. 그런 새가 카메라에 잡혔다는 것은, 영화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화로서 깨닫는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총평

영화 <목소리의 형태>는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상대를 존중하며 이루어지는 소통만이 우리가 함께 살아있을 수 있도록 만든다고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감정과 관계이다. 수많은 감정이 울려 퍼지고, 끝없이 갈등하는 관계가 얽히고설킨 끝에 쇼코와 쇼야는 자신을 사랑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즉, <목소리의 형태>에서 감정과 관계는 주제에 속하고, 이는 감독의 목적이 된다. 하지만, 야마다 나오코 감독에게 있어 감정과 관계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목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에게 <목소리의 형태>는 수단이 목적으로 변해버린 영화인 셈이다. 하지만,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목소리의 형태>를 통해 오히려 수단을 목적으로서 대할 때 깨달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들을 정립한 듯하다. 목적이 되어버린 수단과 마주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은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차기작의 자양분이 되었다. 야마다 나오코는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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