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사랑하며 살아가는 여행자
변질되고 왜곡된 주제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각본가는 감독이나 프로듀서의 의도에 따라 각본을 집필하는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그로 인해 나는 '각본가' 오카다 마리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녀만의 이야기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드러났던 순간은 친구 나가이 타츠유키 감독의 각본을 집필하는 순간뿐이었으니까. 그러했던 오카다 마리는 2018년,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관객을 향하여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오카다 마리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이 줄곧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마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올해 9월, 일본에서 오카다 마리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을 감상하였다. 이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은, 오카다 마리가 감독으로 데뷔하면서까지 표현하고 싶어 했던 주제는 '인간은 사랑하기에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오카다 마리는 영화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 통해 그러한 주제를 훌륭하게 전달한 끝에 드디어 감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아쉽게도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오카다 마리는 감독으로 데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각본가로서의 정체성이 짙게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에서 인간은 사랑하기에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주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가피했던 기나긴 시간의 압축과 마키아의 아름다운 모성은 그런 주제를 온전히 드러내기는커녕, 도리어 가려버리고 말았다.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는 수십 년의 시간이 1시간 50분 정도의 시간 속에 압축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마키아가 마을을 탈출하는 순간부터, 아리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후 눈물을 터뜨리며 앞으로의 생을 꿋꿋이 살아가고자 하는 순간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수십 년의 세월은 실제로는 긴 시간이지만, 영화에서는 2시간 남짓이 된다.
오카다 마리 감독은 각본가로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마키아와 아리엘이 함께했던 삶들이 압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오카다 마리 감독은 저지른다. 수십 년의 세월을 단호하게 압축하여, 마키아와 아리엘이 함께 살아갔던 세월을 115분의 시간으로 만든다. 이는 각본가로서의 결정이다. 압축의 부작용이 부감독과 연출부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완화되어 감동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기를, 오카다 마리 감독은 각본가라는 이전의 정체성을 통해 바라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카다 마리 감독의 바람은 반은 이루어졌고, 반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관객들은 아름다운 영상 속 마키아와 아리엘의 이야기에 감동하였다. 이를 증명하듯, 영화는 나름대로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하지만, 압축의 과정에서 마키아를 향한 아리엘의 마음들까지 압축되고 말았다는 부작용은 남아버리고 말았다. 이 부작용은 마키아와 아리엘의 이야기가 동일선상에서 흘러가지 못하도록 한다.
마키아와 아리엘의 이야기가 동일선상에서 흘러가지 못하는 순간, 오카다 마리 감독의 주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랑을 구성하는 두 요소들 중 하나는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오카다 마리가 표현하는 사랑은 모성과 에로틱을 통해 하나로 완성된다. 그중에서 아리엘을 바라보는 마키아의 마음, 모성은 아름답게 표현된다. 그러나, 사춘기의 아리엘이 피가 이어지지 않은 어머니 마키아를 에로틱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압축의 부작용으로 인하여 유야무야 되고 만다. 분명, 아리엘이 마키아를 에로틱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그 시선을 자신의 입으로 발설하기까지 하는 장면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장면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아쉬워진다. 만약, 이야기를 조금만 덜 압축했더라면 어머니인 마키아를 에로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리엘의 고뇌와 그 해소 과정도 영화 속에 표현되어 작품을 한층 깊이 있게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이를 아쉬움의 영역에 남게 한다. 완전한 감독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는 아쉬움이기에, 더욱 아쉽다.
그리하여, 홀로 남은 요소인 모성은 폭주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에로틱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이상, 모성은 홀로 사랑을 지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사랑하기에 살아갈 수 있다는 영화의 진짜 주제는 가려진다. 피가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마음 하나로 어떤 상황에서도 아리엘을 지키는 마키아의 감동적인 모성만이 남은 영화에서, 관객들은 작품의 진짜 주제를 쉬이 눈치챌 수 없게 된다. 결국,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주제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성의 이야기'로 오독된다. 이 영화의 주제가 올바르게 전달되는 방법은, 마키아의 모성과 사춘기의 아리엘이 가진 에로틱의 시선이 충돌하며 조화되고, 끝내 사랑으로 발전되는 것이었다. 그리해야만 사랑을 통해 아리엘은 살아왔고, 마키아는 살아갈 것이라는, 영화의 진짜 주제가 드러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감독' 오카다 마리가 내린 '각본가'로서의 결정은, 불가피한 것이었음에도 작품의 진짜 주제를 변질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카다 마리는 감독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아름답다. 비록 변질되고 왜곡된 주제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머니 마키아의 모성, 그것은 주제를 구성하고 올바른 길로 표출되도록 돕는 요소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아들 아리엘이 가진 에로틱의 시선이라는 또 하나의 요소와 조화되지 못한 끝에, 홀로 남은 요소는 주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이야기는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이 영화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여러 가지 아쉬움을 발견했지만, 두 부류의 아름다움 역시 발견하였다. 첫 번째는 주제가 되어버린 요소인 모성의 아름다움이었다. 분명, 오카다 마리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성이 아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화면 안에서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어머니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모성만을 가슴에 품고 삶을 헤쳐나가는 마키아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것이 설령 주제가 아니라 해도, 아름답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오카다 마리는 연출가가 아니다. 그러나, 감독으로서의 자질은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연출을 감독의 업으로 생각하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지만, 때때로 그 틀을 깨뜨리는 감독이 나타날 때가 있다.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그러하며, 오카다 마리 감독 역시 그러하다. 물론, 두 감독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방식만큼은 유사하다. 오카다 마리는 잔뼈 굵은 각본가다. 그렇기에, 주제가 변질되고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영화의 노선을 아예 그쪽으로 틀어버려 관객을 울리는 각본을 쓸 수 있다. 그렇다면, 각본을 시각화하는 화면만이 남았다. 여기서 우리는 불안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P.A. WORKS의 베테랑 제작진들이 투입되었다지만, 최종본을 결정하는 것은 감독이고, 그 감독은 연출 경험이 없는 각본가 출신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카다 마리는 아름다운 화면을 감독해 내어, 변질되고 왜곡된 주제를 미화시켜 보였다. 그녀의 리테이크와 영상관이 자세하고 섬세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름다운 화면을 나는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미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카다 마리가 두 번째 영화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을 통해 자신의 주제를 훌륭히 이야기해 내며 감독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았기에, 나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를 다시 감상하며 변질되고 왜곡된 주제가 미화되어 있는 화면 안에서 진정한 주제인 인간은 사랑하기에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고맙게도, 영화는 나의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변질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주제는 살아남아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키아의 모성과, 아리엘의 에로틱. 두 요소는 제대로 융화되지 못해 작품의 진정한 주제를 가려버리고 말았지만, 주제는 가려져 있는 것이지 표현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결국, 다시 보면 다시 보인다. 마키아는 마음으로 낳은 아리엘을 '사랑하기에' 어떤 고난에도 '살아갔다'. 아리엘 역시 마키아로부터 '사랑받았기에', 새로운 사랑을 일구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아름다움이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 과정에서 포기하지 않고 얻은 경험을 다음을 향해 사용할 수 있다면, 인간은 더욱 발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카다 마리 감독 역시 그러했다.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는 아쉬웠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고, 깊숙이 숨겨진 아름다움도 갖고 있었다. 오카다 마리 감독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두 부류의 아름다움을 전부 드러내는 것은 지금의 자신에게는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은 채 불완전한 아름다움의 경험을 다음을 향해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오카다 마리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은 완전한 아름다움을 발산할 수 있었다. 완전함 이전에는 불완전함이 있다. 우리는 때때로 그 사실을 잊는다. 완전함을 좇아 불완전함을 무시한다. 하지만, 불완전함 안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사랑하기에 살아갈 수 있었던 모자의 이야기는 불완전했지만, 아름다웠고, 끝내 차기작의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총평
오카다 마리 감독의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를 다시 감상하는 동안, 이 영화가 오카다 마리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의 프로토타입이자, 완전함 이전의 불완전함이라는 사실이 끊임없이 와닿았다. 수십 년의 세월을 2시간 남짓한 시간으로 압축한 끝에 존재하고 만 작은 구멍들과, 그 과정에서 하나로 합쳐지지 못한 모성과 에로틱이라는 오카다 마리 감독의 아이덴티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아름다웠다. 오카다 마리 감독은 살아감의 이유를 사랑이라고 말한다. 비록 모성의 거대함이 그 이유를 가로막아버렸다고 하더라도, 다시 보면 다시 보인다. 사랑하기에 고난을 딛고 살아가 행복했던 마키아의, 사랑받았기에 사랑하여 사랑을 잇고 살아간 아리엘의 삶은 아쉽게도 가려져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발견할 수 있다. 아쉽게도 영화의 주제는 완전하게 전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구멍을 메우는 사랑의 힘, 앞을 보고 살아가고자 하는 힘은 아름다웠다. Viator, 우리는 모두 사랑하며 살아가는 여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