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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Oct 17. 2023

천년여우

영화를 사랑해야 할 이유


인간은 천 년을 살 수 없다. 그러나, 천 년을 기억된다면, 그것은 천 년을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콘 사토시 감독의 영화 <천년여우>는 그러한 '기억됨'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콘 사토시 감독은 영화 <천년여우>를 통해 어느 여배우의 기억을 되짚어 따라가며, 그녀의 존재와 함께 수많은 시절들을 기억한다. 그 과정은 어떤 영화보다도 영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절대로 만들어질 수도, 상영될 수도 없는 여배우의 기억이 재구성한 삶은 곧 영화 그 자체가 되어, 우리는 끝내 영화의 존재 의의와 영화에 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천년여우>의 사랑, 로맨스는 장르의 정석대로 첫눈에 반한 상대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그 도착점은 조금씩 변해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치요코의 첫사랑은 아무래도 좋을 것이 되어버린다. 어느새 그녀는 첫사랑의 뒤를 좇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며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치요코의 모습은 전부 영화 속에 남았다. 그렇다면, 로맨스의 도착점은 곧 영화가 된다.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콘 사토시 감독의 영화 <천년여우>는, 영화야말로 인간을 불멸할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러한 콘 사토시 감독과 영화 <천년여우>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영화는 인간의 모습을 '촬영하여' 영원히 같은 시간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글이나 사진으로도 인간의 모습을 붙잡아 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글은 주관적인 기록이자, 후대의 인간들로 하여금 상상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묘사이며, 사진은 영화처럼 인간을 같은 시간에 붙잡아 둘 수는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의 인간은 같은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아 움직일 수 있다. 그렇기에, 영화만이 인간을 불멸할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수단으로 남을 수 있다. 콘 사토시 감독은 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후지와라 치요코라는 전설적인 여배우를 화면 안의 카메라로 담고, 화면 밖의 카메라로 한 번 더 담는다. 그리하여, 후지와라 치요코의 일생과, 그녀의 일생을 담아내는 과정은 영화가 된다.

 

타치바나 겐야는 카메라를 들고 후지와라 치요코의 일생을 추적한다. 이는, 카메라 안에 위대한 여배우의 모습과 삶을 담아, 끝내 영화로서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화면 안에서만 카메라가 돌아간다면, 화면 밖의 관객들은 타치바나 겐야가 촬영한 영화의 결과물을 볼 수 없게 되고, 결국 후지와라 치요코는 기억될 수 없게 된다. 이에 콘 사토시 감독은 화면 밖의 카메라로 화면 안의 모습을 촬영한다. 그렇다면, 관객은 타치바나 겐야가 촬영한 결과물을 볼 수 있게 되고, 후지와라 치요코는 기억될 수 있다. 여기서 불멸이 시작된다. 카메라는 후지와라 치요코의 회상과, 이를 쫓는 타치바나 겐야의 모습을 촬영하여 영화로 만든다. 그 순간, 그들의 모습은 영원에 붙잡힌다. 카메라로 촬영된 그들의 모습은, 백 년 뒤에도, 천 년 뒤에도 상영될 수만 있다면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살아 움직일 것이다. 이쯤에서 <천년여우>는 더욱 깊어진다. 화면 밖의 카메라는 화면 안의, 타치바나 겐야 일행의 카메라가 비추는 상대를 따라서 비추기 시작한다.

 

즉, 최종적으로 카메라가 비추는 대상은 후지와라 치요코이다. 그녀는 영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첫사랑을 쫓아 들어간 영화계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영화와 동치시켰다. 열쇠의 주인이 자신의 영화를 관람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후지와라 치요코는 끊임없이 연기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한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거듭난다. 카메라는 그러한 후지와라 치요코의 삶을 따라간다. 사실 그녀의 삶에 휘말린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후지와라 치요코의 삶은 더 이상 보통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영화와 동치시킨 그녀는, 끝내 영화 그 자체가 된다. 그리하여, 관객은 후지와라 치요코와 그녀가 출연한 영화 속의 장면들 중, 어느 쪽이 그녀의 삶이고 어느 쪽이 영화 속의 장면인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게 된다. 그러한 후지와라 치요코의 삶을 카메라는 휘말리듯이 촬영한다. 이는, 더 이상 인물을 촬영하는 것이 아닌, 영화라는 개념을 촬영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첫사랑 역시 이제는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후지와라 치요코가 좇는 것은 생사여부조차 알지 못하는 첫사랑의 뒷모습이다. 어찌 보면 애절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메라는 끊임없이 달려가는 후지와라 치요코의 모습에서 애절함만을 잡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가 잡아내고자 하는 것은 첫사랑의 뒷모습을 좇을 때 그 누구보다 아름다워지는 후지와라 치요코의 모습이다. 그러한 카메라의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은 콘 사토시 감독이다. 그렇기에, 감독은 후지와라 치요코라는 인물이 겪어 온 삶과, 그녀가 출연한 영화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오버랩시키고 탁월한 편집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일생으로 연결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첫사랑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이 영화 그 자체가 되어서라도 끊임없이 달려가는 후지와라 치요코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카메라는 그 아름다움을 촬영하여, 불멸시킨다. 이는 곧 영화 역시 아름답다는 뜻이 된다. 첫사랑의 뒤를 좇을 때 가장 아름다운 후지와라 치요코는, 끝내 영화 그 자체가 되었으니까. 그렇다면, 마지막 대사에서 문제는 풀린다.

 

'그 사람의 뒤를 좇는 나의 모습이 좋거든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후지와라 치요코는 사실 첫사랑의 뒤를 좇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했다고 고백한다. 사실, 이 고백은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 영화의 중반, 노인이 되어버린 후지와라 치요코를 상징하는 '늙은' 노파는 아직 첫사랑을 좇고 있는 '젊은' 후지와라 치요코를 저주한다. 첫사랑이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자신은 어린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에게 있어 자신은 당연히도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후지와라 치요코는 은둔했다. 자신의 늙고 추한 모습을 첫사랑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일생을 고백하는 동안, 후지와라 치요코는 첫사랑을 좇았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떠올리며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동시에 노파의 말을, 자신의 독백을 떠올린다. '나는 그대가 밉다. 또한, 사랑스러워 참을 수가 없어.' 후지와라 치요코는 첫사랑을 좇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시기했지만, 동시에 그 모습을 사랑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정리해 보자. 후지와라 치요코에게는 평생을 좇았던 첫사랑이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후지와라 치요코는 그 첫사랑의 뒤를 좇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한 후지와라 치요코는, 자신의 삶과 영화 속의 장면을 끊임없이 동치시킨 끝에 영화 그 자체가 되었다. 이제 결론은 도출된다. 최종적으로, 사랑은 영화 그 자체에게로 옮겨진다. 자기 자신을 사랑했던 후지와라 치요코는 영화 그 자체가 되어 카메라에 촬영되었고, 그 결과물은 새로운 영화가 되어 천 년을 기억된다. 이는 곧 영화라는 개념이 카메라에 촬영되고, 새로운 영화가 되어 천 년을 기억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사랑'과 '로맨스'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 후지와라 치요코는 자신을 '사랑'하며 영화 그 자체가 되었다. 이쯤에서, 후지와라 치요코와 동치된 영화 역시 '사랑'의 대상이 된다. 후지와라 치요코의 사랑이 자신을 향하고, 영화 그 자체가 되어 카메라에 촬영되는 순간, 영화는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년여우>는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가 된다.

 

그렇다면, 이제 결론을 내릴 시간이다. 어째서 우리는 영화를 사랑하는가?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한다. 후지와라 치요코의 첫사랑 역시,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만을 벽에 그려둔 채 사라졌다. 그 기억은 언젠가 잊힌다. 시간이 지나 노화를 맞이한 인간은, 자신이 살아오며 축적했던 기억을 조금씩 잊어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후지와라 치요코는 말한다. '내일이 되면 기억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영화는 모든 마음과 기억을 영사하여 마지막 순간만을 기억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기억하도록 하고, 잊힐 기억을 보존한다. 어째서 인간은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영화만큼은 카메라로 촬영한 모든 개념들과 존재들을 불멸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열화되지 않은 채, 렌즈에 맺힌 모든 순간을 품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오면서 쌓은 전부를 영화에 맡기고 영원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천 년이 지나더라도, 영화가 있다면 누군가는 우리가 쌓은 전부를 떠올려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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