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경외심, 새로운 종류의 기대
나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을 언제나 지지해 왔다. 그녀의 영화와 TV 애니메이션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일관적으로 화면 안에 표현하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고 새로운 연출들을 적용하는 모습으로 새로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번 신작 영화 <너의 색>은 꽤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슬프게도 아쉬움 역시 다가와 버리고 만 작품이었다. <너의 색>에는 새로움이 없다. 물론 야마다 나오코 감독이 언제나 새로움만을 추구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의 집대성'이라는 내재적 주제의 표현을 위하여 새로움을 배제한 채 야마다 나오코 감독이 지금까지 활용해 왔던 모든 특징적인 연출들을 하나로 모아 훌륭하게 등장시켰음에도 각본은 이를 전혀 뒷받침하지 못했다는 점이 너무나도 아쉽다. <너의 색>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의 변주로서 추억을 꺼내 든다. 감독의 전작들은 이와 동치 된다. 각본은 이들을 이어주는 역할이어야만 했다. 그렇지 못했기에 <너의 색>은 아쉬운 영화이다.
우선 영화의 주제를 복기해 보도록 하자. 표면으로 드러나는 영화 <너의 색>의 주제는 '추억의 탄생과 회상'이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추억의 탄생과 회상을 그려내는 것으로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다시금 추구한다. 여기에 내재적인 주제가 추가된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추억을 기반으로 하여 영화 속에 교토 애니메이션 시절의 작품들을 투영한다. 이는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화면을 구성하는 연출들로부터 확고하게 드러난다. 본래의 의도대로였다면 이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표면의 주제와 내재적인 주제 역시 조화를 이루어야 했으리라. 그러나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그 조화에 실패하고 말았다. '추억의 탄생과 회상'이라는 주제에서 '회상'의 서사는 그럭저럭 쌓아 올렸지만 정작 '탄생'의 서사는 왕도적인 전개가 맛보기 정도로 빠르게 지나버리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계만큼은 항상 치밀하게 쌓아 올리고 화면에 드러낸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결과물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아름다운 추억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도 아름답게 그려져야 한다. 하지만 정작 그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1시간 40분 남짓의 시간 동안 서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갑작스러운 밴드 결성과 몇 번의 연습 이후 그다지 세밀한 묘사 없이 어느 순간부터 친해져 있는 멤버들의 모습 및 그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고민들의 나열, 그리고 마지막 공연을 통한 전형적인 고민의 해소뿐이다. 결국 나는 상당히 생략적인 각본과 마주하면서 내재적인 주제의 은유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였다. 그나마 후술할 후반 공연의 서사 구조와 색의 시각화라는 판타지적 설정으로부터 각각 <케이온!>과 <리즈와 파랑새> 정도를 어렴풋이 느낀 정도였다. 다만 히요코 선생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회상' 서사는 꽤 매력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히요코 선생님은 토츠코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때때로 도움을 주기도 한 끝에 자신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새로이 나아가는 데에 성공한다. 이는 작품 후반에 등장하는 공연 장면과 공명하면서 상당히 인상적인 시퀀스로 남게 되었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탄생'의 과정을 전부 생략하며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하지만 탄생하는 순간만큼은 회상과 공명하며 아름다워진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후반의 공연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만큼은 각본에서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던 전작의 향취가 느껴진다. <케이온!>의 공연 - 여운 - 졸업 파트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로네코도는 공연을 통해 지금까지의 깨달음을 발산한다. 이후 토츠코는 공연의 여운을 느끼면서 춤을 춘 끝에 자신의 색을 발견하게 되고, 멤버들은 고민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저마다 갈 길을 간다. 그 과정에서 히요코 선생님 역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목격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하여 결성되고 활동하는 시로네코도의 모습에서 록 밴드를 결성하고 즐겼던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 혹은 추억을 다시금 목격한 히요코 선생님은 공연 도중에 빠져나와 춤을 춘다. 그것은 회상과도 같은 것이다. 분명하게 지나가버린 시절이지만 그럼에도 영원히 변치 않고 불현듯이 떠오르는 기억을 우리는 추억이라고 부른다.
결국 나는 <너의 색>의 각본을 반쪽짜리 각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추억이 탄생하는 결정적인 순간과 그 순간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추억의 회상만큼은 훌륭하지만 이전의 필수요소인 추억의 탄생 과정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재적인 주제인 ‘교토 애니메이션 시절 작품들의 투영’마저도 반쪽짜리로 만든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후반 공연과 설정에서 각각 <케이온!>과 <리즈와 파랑새>의 요소가 지나가듯 떠오를 뿐이니까. 그러나 연출은 이를 전부 상쇄해 버린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작품마다 색다르고 특징적인 연출들을 선보인 바 있다. <너의 색>에서는 그들이 감독의 인장으로 한 번에 등장한다. <케이온!>의 공연 연출, <타마코 러브 스토리>의 필름 작동을 통한 과거 회상, <목소리의 형태>부터 정확하게 확립된 야마다 나오코 감독만의 화면 구도, <리즈와 파랑새>의 색 혼합 연출 등을 그 예시로 들 수 있겠다. 이들이 적절하게 합일하고 확고한 연출 기반 위에서 아름답게 등장하는 모습이 나로 하여금 <너의 색>의 내재적인 주제를 깨닫게 했다.
결국 영화 <너의 색>의 결정적인 아쉬움은 주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요소가 각본이 아닌 연출이라는 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극 영화는 이야기를 통해 주제를 드러낸 다음 연출로 이를 확정 지어 관객에게 주제를 전달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몇몇 예외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확실하게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고 본다. 따라서 나는 <너의 색>을 '결손된 영화'라고 판단했다. 각본으로 이끌어나가는 이야기를 통하여 전달해내어야 할 주제는 정작 후반에서 제한적으로만 드러나고, 연출이 제한을 커버하여 대신 주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얻을 수 있었다. 언제나 격찬해 마지않았던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특기인 관계의 세밀한 적층을 목격하지 못한 채 끝내 그녀의 작품을 아쉽다고 이야기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는 슬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각본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연출만으로 주제를 표현하고 납득시키는 뛰어난 연출력을 지닌 연출가라는 경외심이었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교토 애니메이션을 퇴사하고 사이언스 사루와 작업하기 시작한 이래 '기억'이라는 주제를 끊임없이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는 '교토 애니메이션 시절'과 상당한 연계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TV 애니메이션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는 헤이케의 영화와 멸문의 이야기를 노래하여 영원히 기억하고 전하고자 결심하는 주인공 비와의 모습을 통하여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의 피해자들이자 동료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단편 영화 <기억의 정원>에서는 환상 속에서나마 사별한 연인과 재회하고 끝내 슬픔을 딛고 살아나가고자 결심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 영화라는 환상의 예술을 통하여 동료들을 기억하고 새로이 나아가고자 결심하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화 <너의 색>은 그 과도기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동료들을 기억하며 새로이 나아갔다. 그전에 잠시 자신의 교토 애니메이션 시절 작품까지 돌아보고자 <너의 색>은 그려진 것이 아니었을까.
이는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너의 색>은 각본적인 면에서도, 연출적인 면에서도 새롭지 않은 작품이다. 각본은 왕도적인 전개의 축약 속에 감독의 교토 애니메이션 시절 작품들을 제한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연출은 다르다. <너의 색>의 연출은 새롭지 않지만, 철저하게 안정되어 각본이 해내지 못한 것마저 해내고야 만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작품들에는 작품마다 분명하게 다른 특징적인 연출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저마다의 작품색에 어울리도록 특화되어 있어서, 하나의 작품으로 합쳐지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그 어려움을 딛고 합일에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너의 색>을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연출적 안정기로 평가한다. <너의 색>은 <목소리의 형태>에 이은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이다. <목소리의 형태>가 사사한 연출과 자신만의 연출의 융합으로 감독만의 인장을 추구하기 시작한 작품이라면, <너의 색>은 <목소리의 형태> 이전과 이후를 전부 융합하여 안정시킨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너의 색>은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앞으로의 행보를 새로이 기대하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TV 애니메이션 <케이온!>을 시작으로 단편 영화 <기억의 정원>을 공개할 때까지 끊임없이 새로워졌다. 이는 나로 하여금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어디까지 새로워질 것인가?'라는 기대를 품도록 만들었다. <너의 색>은 이와는 조금 다른 기대이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너의 색>을 통하여 새로워짐을 잠시 멈추고 이전까지의 새로움들을 하나로 모아 안정화시키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에 나는 ‘어째서?’라는 이름의 기대를 품게 되었다. 어째서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감독 데뷔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안정화 작업을 수행한 것일까? 교토 애니메이션을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홀로 서게 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요소들을 하나로 모아 앞으로도 활용해 내기 위함인 것일까? 결국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일 뿐이기에 나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차기작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너의 색>에는 그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