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 #2

정의와 양심, 천칭과 카메라

by 나가레보시


누군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감독을 한 명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는 나에게 있어 위대한 영웅이자 스승과도 같은 존재라고 단언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를 통하여 나는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고,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신작 영화 <배심원 #2>은 이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걸작이었다. 이 영화를 통하여 나는 ‘진실은 정의의 기반’이라는, 일종의 명제와도 같았던 믿음이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저마다의 정의를 갖고, 때로는 내세우며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최후의 보루, 양심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새 세상은 진실을 배제한 채 저마다의 기준을 정의로 대신 내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대립을 불러일으키게 될 현상임이 틀림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에 ‘양심’이라는 천칭을 제시하며, 양심 위에서 저마다의 정의가 진정 정의로운 것인지에 대하여 깊이 고뇌하도록 만든다. 그 과정이 전부 카메라라는 영화의 오리지널리티로 담긴 끝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명실상부 거장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증명해 낸다.


정의와 양심

‘진실은 정의의 기반’이라는 믿음은 오랜 시간 동안 명제로 기능해 왔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진실을 파헤쳐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명제는 무너지고 있다. 불편하거나 불리한 진실은 외면한 채 자신만의 정의를 만들어 내세우기 시작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질문한다. ‘그 정의는 진정 정의로운 것인가?’ 이전의 정의는 진실이라는 확고한 판별 기준을 보유하고 있었다. 진실 위의 정의는 정의로운 것이었고, 거짓이라면 불의였다. 하지만 명제가 무너져가는 ‘포스트 저스티스’의 시대에서 진실이라는 기준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개개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정의가 올바른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판별될 수 없다. 모두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 위의 정의에 비하여 오직 나 하나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금의 정의는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판별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갈등은 일어난다. 저마다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기 위하여 타인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과연 정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주인공 배심원 2번과 검사에게는 저마다의 정의가 있다. 배심원 2번의 정의는 가족의 안녕을 지키는 것이고, 검사의 정의는 악당을 심판하고 검사장에 당선되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갈등할 수밖에 없다. 배심원 2번은 자신의 정의를 위하여 배심원단을 조종해야 하고, 검사 역시 자신의 정의를 위하여 진실에 대한 의문을 가까스로 덮고 피고인을 범인으로 확정 지어야 한다. 그 순간 첫 번째 양심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배심원 2번의 양심은 무고한 사람이 벌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대신 벌을 받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적어도 그에게 무죄를 내려주고 싶다. 검사 역시 그러하다. 그녀의 양심은 만약 사건의 풀이가 잘못되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진범을 찾아내고 무고한 사람을 석방하는 고전적인 정의의 기반,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잔혹하다. 결국 진실 위의 정의보다도, 그 상위에 존재하는 양심보다도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결단을 정의로 믿어버리도록 만드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다. 결국 배심원 2번과 검사는 양심으로부터 눈을 돌린다. 앞으로의 삶을 결정지을 가정의 안녕을 위하여, 악당을 심판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 능력을 입증하기 위하여. ‘진실은 정의의 기반’이라는 명제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때때로 양심은 인간의 본성으로 작용할 때가 있는지도 모른다. 정의라고 믿으며 내렸던 판결이 진정 정의로운 것인지 끝없이 되묻는 양심의 가책을 인간은 결국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두 번째 양심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정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천칭이다. 만약 그것이 객관을 잃었을 때, 어떻게 옳고 그름은 판단되어야 하는가?


양심은 이를 판가름하는 상위의 천칭으로서 진정 작동한다. 배심원 2번은 자신의 정의를 위하여 진실을 날조한다. 검사 역시 같은 이유로 배심원 2번을 믿는 그의 아내의 발언에서 모순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주장을 확정 짓는다. 이제 두 사람은 각자의 정의, 천칭 위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그들 내면의 양심이 외친다. ‘그것은 진정 정의로운가?’ 결국 배심원 2번과 검사는 다시 한번 천칭 위에 올라선다. 영화는 양심의 가책으로 배심원 2번의 집에 찾아가는 검사와, 올 것이 왔다는 듯한 반응으로 검사를 맞이하는 배심원 2번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명확한 해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그저 두 사람을 최종적으로 양심의 천칭 위에 올려 세우면서 지금까지의 주제를 간단하고 강력하게 요약할 뿐이다. ‘명제는 힘을 잃었고 각자도생의 정의만이 힘겹게 버티는 시대에서, 양심 아래 그대들의 정의는 진정 정의로운가?’ 우리는 그의 질문에 고민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살아남기 위하여 진실을, 정의를, 양심을 저버리는 순간 그것은 삶이 아니게 될 테니까.


천칭과 카메라

카메라와 그 결과물로 완성되는 화면은 지금까지의 주제를 영화 예술로 확정 짓는 요소들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끝내 위대한 거장으로 칭송될 수 있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는 천칭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카메라와 화면의 힘으로 은연중에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중의 인물들은 계속해서 천칭 위에 오른다. 그 모습은 다양하게 촬영되어 화면 위에 드러난다. 눈을 가리고 천칭을 든 여신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좌우로 긴 시네마스코프 비율과 공평한 화면 전환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피고인과 검사는 좌우로 긴 시네마스코프 비율의 힘으로 각각 좌우에 나란히 선다. 마치 천칭처럼. 그것은 검사의 정의를 확정 짓는 천칭이다. 그 위에 오른 피고인과 검사의 무게추가 흔들린 끝에 피고인에게 유죄가 선고되면서 검사의 정의는 확정된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정의로운 것일까? 진실된 것일까? 배심원 2번은 끝없이 떠오르는 의문을 떨쳐내고 가정의 안녕이라는 자신의 정의를 지켜내야 한다. 그 순간 카메라는 배심원 2번과 그의 아내를 공평하게 번갈아 포착하며 천칭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위에 오른 배심원 2번은 완강한 부인과 함께 자신의 정의를 관철해 낸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정의로운 것일까? 진실된 것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카메라와 화면의 힘으로 끝없이 질문한다.


이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카메라로 만들어지는 화면 속에 최종적인 양심의 천칭을 준비하고, 그 위에 두 인물을 평등하게 올려 세우면서 영화를 끝맺는다. 그들이 무엇을 결심하고 무엇을 직감했는지는 언어화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 수 있다. 피고인을 심판하고 검사장이 되어 자신의 정의를 관철했음에도 검사는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가정을 지켜낸 배심원 2번 역시 자신만의 비밀을 영원히, 불편하게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양심의 가책이다. 진실의 정의가 작동하지 않는 시대에서 난무하는 정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상위의 존재이다. 끝내 두 사람은 천칭 위에 오른다. 카메라는 그들의 모습을 한없이 평등하게 번갈아가며 포착한다. 그렇게 우리는 목도한다. 양심의 천칭 위에 평등하게 올라 진정한 명제의 정의 앞에 선 두 사람의 모습을. 그것만으로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가르침은 분명 전해져 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총평

‘진실은 정의의 기반’이라는 명제는 오랫동안 명제로 받아들여졌지만, 그것이 흐릿해질 때 인간은 저마다의 정의를 갖고 내세운다. 그러나 조금 더 근원적인 지점에서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정의로운 행동인가?’가 아닌 ‘그것은 양심적인 행동인가?’이다. 정의와 양심은 다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양심은 정의의 상위에 존재하는 관념이다. 예를 들어 아돌프 히틀러는 차별과 학살을 정의라고 선전했지만, 그것이 양심과 같은 것이었다면 오스카 쉰들러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검사는 피고인의 심판을 통한 자신의 당선을 정의로, 주인공 배심원 2번은 가정의 안녕을 정의로 생각하여 선택한다. 그러나 고뇌한다. ‘나의 정의는 양심적인가?’ 끝내 고뇌하는 두 인물이 천칭 위에 마주 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그 일련의 과정을 카메라로 온전히 담아내고 표현한다. 좌우로 긴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통하여 피고인 측과 검사 측을 포착하고, 서로 번갈아 마주 보는 구도를 통하여 아내 측과 배심원 2번 측, 검사 측과 배심원 2번 측을 교차적으로 포착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천칭의 이미지 위에 검사와 배심원 2번을 최종적으로 올려 세운다.


천칭은 정의의 상징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를 양심이라는 더 상위의 천칭 위에 한 번 더 올리면서 ‘당신의 정의는 양심적인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끝내 두 인물의 고뇌는 화면을 넘어 관객에게로 전달된다. 이를 온전히 카메라의 힘으로 해내는 위대한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영화 <배심원 #2>은 이전의 작품들처럼 걸작임이 틀림없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