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은 누구인가
인간은 외면하는 존재이다.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인간은 서로를 외면한다. 그것은 달리 말해 전체적인 것이며 이기적인 것이다. 전체적이고 이기적인 외면, 그것이 세상을 멸망으로 이끈다. 영화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1>은 ‘외계 함선의 등장’이라는 SF 장르를 통하여 이를 풍자하며, 동시에 전체와 이기에 의한 멸망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정반대의 존재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야기할 수 있다. 영화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1>은 독립된 단일 작품으로서 명확하게 주제를 표현해 내며, 연작 구성 기획의 ‘파트 1’로서 ‘파트 2’의 존재를 충격적으로 암시하여 관객의 기대를 이끌어내는 좋은 작품이다.
세상은 어떻게 멸망하는가
영화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1>(이하 ‘데데디디’)의 세상은 얼핏 보면 외계 함선의 등장이라는 거대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와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거시적인, 혹은 거짓된 것일지도 모른다. 외계 함선의 등장이라는 거대한 충격이 과연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까?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표면에 가려져있던 진실들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데데디디’ 속 일본은 엇나간 세계이다. 사회도 개인도 모두 엇나가 괴상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사회는 전체가 되었고 개인은 이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어떻게 세상은 엇나가게 되었는가?’
‘데데디디’는 이에 ‘불안’과 ‘불이해’를 해답으로 내놓는다. 정체불명의 외계 함선이 나타났다. 그로 인한 인명피해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세상은 동요하고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가? ‘나의’ 평범한 일상은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가? 이에 사회와 개인은 ‘불이해’를 선택하며 자신들을, 자신을 정체불명의 존재로부터 지켜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부터 세상은 본격적으로 엇나가버리기 시작한다.
사회는 이해로부터, 외계 함선이라는 존재의 본질로부터 눈을 돌린다. 그 순간 외계 함선의 존재는 철저한 침략자로 규정되며, 사회 역시 전체로 엇나가버리고 만다. 엇나간 사회는 타 집단, 즉 외계 함선과 그 탑승자들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해해보려 하지 않은 채 철저한 적으로 규정하여 소탕하려 든다. 외계 함선의 존재에 불안에 떨던 사람들은 이에 현혹되어 ‘불이해’의 과정을 찬양하기 시작하고, 전체화되어 가는 사회 속의 회의적인 의견들은 불안을 조장하는 존재로서 전체의 강령에 의하여 말살된다. 그것은 광기이다.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즈음에는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광기.
한편 외계 함선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식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불안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개인의 존재 역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돌아보게 된다면 결국 우리는 안타까운 광기를 발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어째서 개인의 평범한 일상은 유지될 수 있는가? 결국 ‘불이해’라는 선택이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현재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들여다보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지금의 세상은 정체불명의 외계 함선이 하늘 위에 나타나고,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인명피해까지 종종 발생하는, 지극히 혼란스러운 세상이다. 개인의 일상은 이 모든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은 결과물이다.
혼란이라는 현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외면한 끝에 광기의 개인은 탄생한다. 기반 시설이 무너져내려도, 인명피해가 발생해도 그 안의 진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일상과는 관계없는, 혹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일로 받아들여버리는 순간, 자신이라는 개인의 평범한 일상이 유지되는 대가로 평범한 일상을 잃어버리게 되는 타인이라는 또 다른 개인의 존재를 이해하지 않은 채 철저히 말살하는 광기 어린 이기는 탄생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멸망하기 시작한다. 영화 속 또 다른 세계선은 인간의, 세상의 멸망을 암시한다. 잘못된 인간들만이 들어찬 세상은 멸망해야 마땅하다는 외계인의 주장은 점점 실현되어 가기 시작한다.
이레귤러
세상의 멸망은 확정되었다. 또 다른 세계선에서 이미 암시되었을뿐더러, ‘파트 2’를 예고하는 영화의 엔딩 역시 멸망을 확실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떻게 멸망을 막아낼 것인가?’가 아닌 ‘누가 멸망 속에서 살아남는가?’이다. 세상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은 ‘불안’에 의해 ‘불이해’라는 잘못된 선택을 저질러 각각 전체와 이기로 어긋난 버린 사회와 개인의 존재이다. 멸망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 역시 이에 속하는 어긋난 버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류, ‘레귤러’이다. 레귤러로서 잘못된 인간과 세상이라는 결론 끝에 살아남지 못한 채 멸망하고 만다. 그렇다면 멸망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정반대에 속하는 비주류, ‘이레귤러’ 임이 틀림없다.
그 이레귤러란 물론 주인공 일행이다. 그녀들에게는 일상이 있었다. 여전히 하늘 위에 떠 있는 외계 함선마저 그녀들에게는 일상의 일부로서 때로는 놀잇감이 되었고, 외계 함선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여 즐거운 방과 후를 보내는 일상의 나날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특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 소녀들에게 외계 함선은 ‘전체적인’ 인식과는 달리 ‘적’으로는 판명되지 않는다는 점과, 따라서 그녀들은 세간의 여론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외계 함선의 존재를 아예 인식하지 않으려는 기성적인 일상과는 달리 그마저도 일상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이미 소녀들은 이레귤러의 존재였다. 이를 확실하게 못 박는 것은 소녀의, 소녀들의 일상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과정이다.
카도데는 착실한 학교 생활을, 평범한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외부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내밀한 사생활로 들어가 보면 ‘소녀’의 일상은 이미 무너져있다. 외계 함선이 하늘 위에 나타난 날 카도데의 아버지는 실종되었고, 어머니는 외계 함선이 방출한다는 ‘A선’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며 자신의 딸조차 신용하지 못하는 광인이 되었다. 결국 카도데에게 일상이라고 할만한 것은 방과 후 친구들과의 만남뿐이었다. 그 덕분에 ‘소녀들’의 일상은 어떻게든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붕괴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늘 함께하던 단짝 키호가 연인과 헤어지자 함께 달래주기 위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던 날, 그녀는 외계 함선과의 교전에서 희생되고 만다. 그렇게 소녀들의 일상마저 무너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들은 살아남으려 한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하여 소수를, 타인을 외면하는 전체와 이기의 광기에도 서로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살아남으려 한다. 결국 소녀들은, 소녀들만큼은 모든 순간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미 붕괴한 일상을 살아가던 카도데의 곁에는 늘 오란이 있었다. 키호의 죽음을 외면하며 일상을 지속해보려고 했던 오란은 결국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한 채 친구들과 함께 울음을 터뜨린다.
그렇기에 소녀들은 멸망해 가는 세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외면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힌 잘못된 인간들로 들어찬 세상은 멸망해야 한다고, 외계인은 말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잘못된 인간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또 다른 세계선에서 잘못된 길로 어긋나 걸었던 카도데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렇다면 반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잘못되지 않은 인간일지도 모른다. ‘데데디디’의 세상은 다수가 소수를, 개인이 타인을 철저히 외면하는 전체주의와 이기주의의 광기 어린 세상이다. 이처럼 ‘잘못된 인간’이 ‘레귤러’가 되어버린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다. 결국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타인의 비극에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는, 잘못된 선택으로 오염되지 않은 ‘잘못되지 않은 인간’, 달리 말하면 ‘이레귤러’의 존재이다.
총평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 나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설득력 있고 흥미진진한 각본과 이를 뒷받침하는 연출로 장르적인 재미와 함께 훌륭하게 풀어나가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1>은 그러한 점에서 충분히 좋은 영화였다.
이 영화의 주제는 불안을 떨쳐내고자 어긋난 끝에 광기에 빠져버린 사회와 개인의 비판 및 이와 반대되는 주인공들의 행보를 통하여 우리 사회와 개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충격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1>은 이를 훌륭하게 표현한다. ‘하늘에 떠있기만 하는 외계 함선’이라는 SF적 상징물 아래에서 광기에 빠져 타락하는 사회와 개인의 광풍에도 필사적으로 일상을 지켜 살아남아가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이 영화가 단일 작품으로도 충분히 주제를 훌륭하게 전달하는 좋은 영화임을 깨닫도록 해준다.
동시에 연작 기획으로서 ‘파트 2’를 예고하는 ‘파트 1’으로서도 이 영화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외계인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존재가 오란으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선을 암시하는 장면으로부터 드러나는, 세상의 멸망과 그로부터 살아남고자 고군분투하게 될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파트 2’의 존재를 우리 관객은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원작자 아사노 이니오의 만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잘 자, 푼푼>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몰려왔던 불행의 장면들이 너무나 불쾌해서 끝내 읽기를 그만둔 기억이 아직까지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1>은 단일 작품으로서도, 연작 기획의 ‘파트 1’로서도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