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

나는 빛을 믿는다, 믿고 싶다

by 나가레보시


<브루탈리스트>는 좌절과 성공이라는 정반대의 키워드가 기묘하게 공생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브루탈리스트>에서 예술과 예술가는 좌절함에도 끝내 완성에 성공하며,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미명 아래 착취당했던 자는 훗날 새로운 착취자로 거듭나게 된다. <브루탈리스트>의 주제는 마치 데칼코마니 같다. 예술과 예술가의 좌절과 성공, 아메리칸 드림의 착취에 따른 좌절과 훗날의 반복이라는 두 주제는 서로 맞물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끝내 꼭 들어맞게 된다. <브루탈리스트>는 표면적으로 보면 어떤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고통을 진통하며 썩어가면서도 완성되고자 하는 예술과 예술가의 욕망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반복되는 착취의 역사 역시 내면적으로 그려진다. 우리는 그 양면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어쨌거나 결과만을, 목적지만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과정을 되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브루탈리스트>는 그 사실을 촬영을 통한 기록의 '과정'과 끝내 완성되는 '결과'의 데칼코마니를 통하여 냉소적으로 폭로한다.


예술의 회한

작중에서 주인공 라즐로 토스는 위대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시간의 흐름과 사회적, 정치적 영향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품'. 건축은 그중에서도 가장 정의에 들어맞는 예술의 한 분파일지도 모른다. 거대한 재해가 일어나거나 인위적으로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건축 작품은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떻게 위대해질 수 있을까? '살아남았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야말로 '위대한 예술'이라는 칭호를 얻기 위한 과정에 꼭 들어맞는 말일 것이다.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남아야 하며, 살아남았다는 것이야말로 시간, 사회, 정치 그 어떤 것의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증거일 테니까. 물론 살아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도 그 사실은 끊임없이 상기된다. 예로부터 예술은 끝없이 휘둘리는 존재였다. <브루탈리스트>는 그로 인한 고통과 좌절 끝에 완성되는 예술의 순간을 아메리칸 드림에 결부 지어 이야기한다.


라즐로는 나치의 박해에 의하여 고향과 가족을 모두 잃고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단신으로 미국에 도착하여 새롭게 꿈을 꾼다. 그 순간부터 라즐로는 휘둘리고, 고통받으며, 썩어가기 시작한다. 라즐로는 예술가로서 예술에 대해서는 그 누구와도,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타협할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기심과 욕망이 들어찬 세상에서 예술과 예술가는 끊임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다. 결국 예술과 예술가는 순수할 수 없다. 권력자와 자본가는 자신들의 이기심과 욕망의 발현으로서 예술가에게 예술 작품을 '발주한다'. 자신은 예술과 예술가의 보호자라는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기심과 욕망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하여 예술과 예술가를 통제하려 들기 시작하고, 그렇게 고통은 시작된다. 성공한 자본가 밴 뷰런은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라즐로에게 작품을 의뢰하지만, 그 기질로 라즐로를 끝없이 휘두른다. 하지만 라즐로는 휘둘림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이기심과 욕망의 감정은 권력자나 자본가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즐로는 끝없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을 뿜어내고, 완성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이기심을 발현하기 시작한다. 끝내 라즐로는 조금씩 썩어간다. 끊임없이 휘둘리며, 완성을 위하여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심지어 겨우 재회한 가족들마저도 저버려가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억지로 진통하며 썩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아름다워지고자 하고, 예술가는 아름답게 만들고자 한다. 그렇게 작품은 완성되고, 인정받는다. 또한 과정보다도 중요한 것은 결과, 목적지라는 엔딩으로 라즐로의 건축은 '위대한 예술'로 거듭난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맹점이 존재한다. 정녕 과정보다도 중요한 것은 결과일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결과만큼이나 과정 역시 아름답다는 사실을 나는 여러 번 목격한 바 있다. 영화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진정 결과가 더 중요했다면, 영화는 결과 이전의 과정을 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은 일종의 데칼코마니적 합일이다. 과정과 결과가 합일하여 하나의 예술로 거듭난다.


모든 것에는 과정이 있다.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그 사실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는 것처럼, 과정이 있기에 결과가 있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모여 예술의 존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브루탈리스트>를 '예술의 회한'을 담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결과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결과를 평가받았기에 '위대한 예술'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술만큼은, 예술가만큼은 결코 지나온 과정을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 결국 되돌아보게 된다. 위대해진 순간 지나왔던 고통의 과정을, 진통의 과정을, 썩어감의 과정을 회한하게 된다. 카메라는 필름 속에 그 '과정'을 기록하고, 영화라는 '결과'로 만들어낸다. 이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브루탈리스트>는 훌륭한 '영화'로 거듭나게 된다. 고통의 과정을 지난 끝에 평가받아 위대한 결과로 거듭나는 예술의 모습을 영화라는 예술의 과정과 결과에 일치시키는 순간과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이 기록되어 영사되는 화면이라는 결과를 향하여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꿈의 착취

<브루탈리스트>는 분명 예술의 과정을 기록한 결과를 통하여 위대하게 거듭나는 예술의 순간을 최종적으로 포착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최초의 착취와 고통은 반복된다. 예술은 꿈이다. 또한 꿈은 영화 속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이라는 땅과 동치 된다. 라즐로는 나치의 박해로부터 살아남아 미국 땅에 발을 내딛고, 예술가로서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한다. 흔히 이야기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다. 하지만 그의 꿈은 아이러니하게도 꿈과 같은 땅에 의하여 착취당하고 만다. 미국인의 표상처럼 보이는 밴 뷰런은 언뜻 보면 예술이라는 라즐로의 꿈을 함께 실현해 나갈 동반자, 혹은 아메리칸 드림의 현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뒤에는 착취의 역사가 도사리고 있다. 꿈과 같은 땅 미국의 역사는 착취의 역사였다. 원주민을 내몰아 깃발을 꽂았고, 흑인을 노예로 부리며 부를 거머쥔 역사 위에서 미국은 만들어졌다. 그러한 땅이 이제는 정신을 착취하려고 한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순서인지도 모른다. 물질적인 풍요 다음에는 언제나 정신적인 풍요를 바라게 되는 법이다.


그것은 항상 이어져온 역사였다. 다만 착취로 시작된 역사인 이상 그 역시 이어질 수밖에 없을 뿐이다. 그렇기에 라즐로의 예술이라는 꿈은 미국이라는 땅의 최종적인 발전 단계인 정신적인 풍요의 달성을 위하여 착취당하고 만다. 이는 일종의 강간일지도 모른다. 결국 예술이라는 순수한 꿈은 정신적인 풍요를 목적으로 한 욕망의 휘두름 끝에 순수를 잃고 만다. 이를 증명하듯 밴 뷰런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혹은 언제부터인가 주체를 잃은 라즐로를 강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취에 욕망이 존재하는 것처럼 꿈에도 욕망은 존재하고, 놀랍게도 두 관념은 결과를 낸다는 목적에 있어서 닮아있기도 하다. 하지만 착취에는 과정이 존재하지 않고, 꿈에는 존재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역사는 승자에 의하여 쓰인다는 말처럼 성공한 착취의 과정, 역사는 의도적으로 지워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슬픈 것은 그렇게 사라진 역사 속에 아름다운 꿈의, 예술의 과정 역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결국 최후에는 결과만이 남은 채, 예술은 착취당하고 도용되어 주체를 잃고 만다.


그렇기에 라즐로가 미국에서 처음 만나게 된 동료 고든이 흑인이라는 것은 확실한 의도를 지닌 설정일 것이며,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에서 흐르는 음악의 일부분은 다인종의 선율이 자유롭게 영향을 주고받은 끝에 탄생한 재즈이다. 그러나 정작 미국에서 다인종의 자유는 오랫동안 보장되지 않았던 것처럼, 라즐로와 그의 꿈, 예술 역시 그러했다. 결국 라즐로는 착취의 고통을 강제로 진통하며 썩어간 끝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아내 에르제벳과 함께 조카 조피아가 먼저 미국을 떠나 자리 잡은 유대인의 땅, 이스라엘로 향하고자 한다. 같은 민족의 땅에서라면 더 이상 꿈은 착취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은 라즐로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한다. 엔딩에서 조피아는 끝내 위대한 예술을 창조한 거장으로 거듭난 라즐로의 업적을 칭송하는 연설을 한다. 그 칭송은 핍박의 역사에서 고통스럽게 살아남아야만 했던 유대인의 정체성이 투영되어 있다는 요지를 담고 있다. 언뜻 보면 조피아의 연설은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대사는 결국 새로운 착취로 다가오고야 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조피아는 과정보다도 목적지가 중요하다고 연설한다. 그것은 수천 년을 떠돈 유대 민족이 오랜 수난 끝에 고향 땅 이스라엘로 되돌아왔다며 예술의 힘을 빌어 선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에 라즐로가 이야기했던 위대한 예술의 정의를 떠올려보면, 결국 조피아의 연설은 라즐로의 예술을 다시 한번 착취하고, 강간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시간, 사회, 정치, 그 어떤 것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자 했던 예술가 라즐로는 기나긴 박해와 착취의 시간으로부터의, 유대인인 자신과 이민자인 자신을 핍박하는 사회와 정치로부터의 고통을 강제로 진통하고 썩어가며 견뎌낸 끝에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 라즐로에게 고통을 안긴 착취의 역사는 절망스럽게도 도망친 땅 위에서 반복된다. 희망에 부푼 듯 보이는 조피아의 연설, 그것은 착취라는, 고통스럽게 떠나보냈던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오버랩된 끝에 시온주의의 모습으로 변모하여 반복된다. 이를 지켜보는 라즐로의 표정은 더 이상 읽을 수 없다.


나는 빛을 믿는다, 믿고 싶다

<브루탈리스트>는 이질적인 영화이다. 고통스럽게 잊힌 과정 속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그 결과와 짝을 맞추어 진정 위대한 예술의 존재를 포착하려고 하면서도, 반복되는 착취의 역사를 녹여내면서 위대한 예술의 존재에 대한 의문 역시 남기기 때문이다. 동시에 <브루탈리스트>는 기묘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질적인 두 주제는 끝내 데칼코마니의 모습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존재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브루탈리스트>는 예술의 과정을 기록하고 결과로 내보이며 그 위대함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 뒤편의, 반복되는 착취의 역사 역시 함께 상기시키며 위대함이라는 명부에 상반되는 암부 역시 내보여 빛과 어둠의 데칼코마니를 구성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오로지 나의 바람이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아름다운 예술의 빛을 믿고 싶다. 필름에 담겨가는, 화면에 영사되는 빛의 순간들을 믿고 싶다. 그 뒤편의 어둠마저도 빛을 담아내어 영사하는 영화 예술의 앞에서 아름다워졌다고 믿고 싶다. 그렇게 추구되는, 아름다움이라는 예술의 빛을 다시금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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