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클럽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by 나가레보시


소마이 신지 감독의 영화 <태풍 클럽>을 관람하는 동안 나는 공포와 슬픔의 감정을 느꼈다. 공포는 미지로부터 기인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고 있는 것이라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태풍 클럽>의 공포는 반대로 알고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특정한 시기에만 발산할 수 있는 광기의 존재를, 그 시기를 겪어보았기에 알고 있는 나는 광기가 극대화되어 화면에 드러나는 순간 공포를 느꼈다.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아무리 두렵다고 하더라도 결국 나 역시 겪어보았던 시기이기에, 발산하던 도중에는 그것이 광기임을 몰랐기에 즐거웠고, 시간이 흘러 되돌아보면 공포의 광기이지만 동시에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는 순간이었기에 나는 슬펐다. 청소년기란 양면적인 구석이 있는 시기인 것 같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었지?' 하는 공포감이 들면서도, 한없이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슬픔 역시 남겨주기도 하니까. 그러했던 시기를 겪으며 나는, 우리는 어린 시절의 영혼을 털어내고 남은 빈 껍데기와도 같은 몸과 마음에 새로운 영혼을 채워 넣으며 성장하였다. 소마이 신지 감독은 영화 <태풍 클럽>을 통하여 그 준비 단계를 극대화하고 화면 속에 담아낸다. 끝내 우리는 목격한다. 광기와 깨달음을 지나 우리는 어떻게 새로 태어났는지를, 어째서 우리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지를.


원초적인 광기와 동경

<태풍 클럽>을 관람하는 동안 10대 때 생각이 많이 났다.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 속된 말로는 '중2병'이라고들 부르는, 누구나 겪게 되는 시기를 훗날 되돌아보면서 느끼게 되는 광기와 동경의 그리움과 슬픔을 <태풍 클럽>이라는 영화는 다시금 느껴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중2부터 고1까지의, 사춘기의 절정에 달하는 시기는 말 그대로 원초적인 광기를 미친 듯이 발산하는 시기였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이기에 존재하는 충동과, 독립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반항심, 그리고 무의식적인 동경이 뒤엉켜 생성되는 광기를 사춘기의 청소년은 발산한다. 그것은 제멋대로이다. 아직 형성되는 중이기에 불안정한 자아와, 아직 남아있는 어린아이의 충동이 제멋대로인 발산을 야기한다. <태풍 클럽>은 바로 그 순간을 화면 안에 구현하는 영화이다. 서서히 몰려오는 태풍의 존재를 질풍노도의 시기에 일치시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시기를 관객들로 하여금 알 수 있게끔 예보함과 동시에, 태풍이 몰아치는 순간 발산되는 광기에 빠져들도록 만드는 화면은 충격적이면서도 왠지 모를 공감과 그리움을, 슬픔을 유발한다.


<태풍 클럽>의 광기는 물론 영화적인 과장이다. 아무리 누구나 겪었던 시기를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영화 속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을 확률은 현저히 낮다. 하지만 시절의 극대화를 촉진하는 과장 덕분에 우리는 공감하고, 그리워하며, 슬퍼할 수 있게 된다 영화 속 아이들의 행동이 지나간 우리의 시절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될 때, 그것이 과장을 통하여 극대화된 것이라면 느껴지는 감정 역시 극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느끼게 된다. '저렇게 한심한 어른이 되지는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른이 되어야만 피울 수 있는 담배를 거리낌 없이 피우는 아이들처럼 무의식적으로는 어른의 세계를 동경하며,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며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날뛰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그 시절은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슬픔을.


한편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광기만큼이나 동경 역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광기의 사례처럼 무의식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로 드러나기도 한다.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늘 두려웠기 때문에 그러했던 적은 없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나의 친구들은 얼른 어른이 되어 어른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차이가 나로 하여금 <태풍 클럽>을 관람하는 동안 슬픔을 느끼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만큼 어른이 아니었던 시절은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와서, 동경은 현실과는 꽤나 유리되어 있다. 동경은 이해로부터 가장 먼 감정이라고 했던가? <태풍 클럽>에는 '도시의 어른'에 대한 이해 없는 막연한, 광기 어린 동경을 품고 가출하는 소녀 '리에'가 등장한다. 하지만 가출 소녀는 깨닫는다. 동경했던 도시도, 어른도 어떤 면에서는 삭막하고 여전히 어린아이 같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소녀는 다시 아이로 되돌아와 학교에 간다. 광기 어린 동경은 어디로 갔냐는 듯, 물에 잠긴 학교에 들어서며 '마치 금각사 같다'라며 감탄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나고, 동시에 우리에게 최종적인 주제를 전해준다.


영화가 끝을 맺는 순간, 나는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떠올렸다. 절대적인 무언가를 불태워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태풍 클럽>은 <금각사>와 닮았거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금각사>의 주인공 '미조구치'는 자신의 미의식을 금각의 아름다움과 일치시키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새로운 아름다움과 마주하여도 금각의 미의식적 지배는 미조구치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옥죌 뿐이다. 결국 미조구치는 금각을 불태운다. 그 순간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린다. 금각으로부터 해방된 미조구치는 드디어 새로이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절대적인 속박의 파괴'를 통한 삶, 그것이 바로 <금각사>의 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태풍 클럽>의 주제는 이를 인용함과 동시에 변형시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엔딩의 학교는 태풍에 의하여 침수된 채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이는 파괴된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다음 단계를 준비하기 위하여 불태워진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는 앞서 <태풍 클럽>을 '광기'와 '동경'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약하였다(사실 더 압축해 보면 동경 어린 행동 역시 충동적이고 반항적이라는 점에서 광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각각 불태워진다. 태풍으로 잠겨버린 학교 안에서 원초적으로 발산되던 광기와 제멋대로 이루어진 동경 어린 행동은 태풍이 멎자 함께 사그라든다. 마치 연소되는 불꽃처럼. 한때의 광기와 동경은 그렇게 전부 불타버리고, 아이들에게는 껍데기뿐인 몸과 마음만이 남는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 난다.


나는 <태풍 클럽>을 성장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껍데기만 남은 몸과 마음을 비추는 것으로 그 직전의 단계를 담아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껍데기 안에 올바름을 담아낸다면 아이들은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름을 담아낸다면 영화 속에 등장한 몹쓸 어른들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태풍 클럽>은 이와 같은 갈림길 역시 담고 있다. 파괴된 학교에서 광기를 발산하는 무질서한 아이들의 모습과, 처음에는 광기 어린 모습이었지만 현실을 깨달을수록 차분해지며 지금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인 학교로 돌아오는 아이들의 모습의 차이이다. 또는 죽음을 선택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깨닫지 못한 광기는 죽음을 택한다. 깨달음을 얻은 동경은 되돌아와 살아간다. 광기와 동경은 불타 사라졌고, 아이들에게는 껍데기만이 남았다. 무엇을 불어넣을지는 앞으로의 아이들에게 달려있다. 다만 그 앞날의 모습까지, 영화는 조금이나마 비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평

<태풍 클럽>은 '성장' 영화가 아니다. 성장을 준비하는 단계를 묘사하는 영화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이 올바른 모습으로 성장한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영화 같기도 하다. 결국 알 수 없다. 이전의 것들을 불태웠으니 우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성장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장통, 그렇다, 그럴지도 모른다. 한때의 광기와 동경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고뇌, 질풍노도의 시기의 고뇌로부터 비롯되는 아픔의 해소, 혹은 도피처인지도 모른다.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한 아이는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 견디어 깨달은 아이는 살아간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빈 껍데기만을 남긴다. 그 안에 무엇을 깃들게 하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행방은 갈린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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