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옳고, 너도 옳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 (2편)
*이 이야기는 일부 외국계 회사에만 해당이 되는 내용이니 오해 없길 바랍니다.
모두의 의견을 다 듣고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분위기의 외국계 회사를 다니다 보면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많다.
미팅 때 부정적인 단어를 잘 안 쓰려고 하다 보니 어떤 매니저가 앞으로 A는 A로 합시다라고 낸 의견에 다른 매니저가 맞아요, 저는 A는 B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다. (No, but 이 아니라 Yes, and를 사용한다) 그럼 총괄 매니저는 둘의 의견에 모두 동의해요 (I agree both of you)라고 응대하고 중간에 낀 나는 이제 A는 A로 할지, B로 할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거다. 정말 코미디 같은 대화지만 실제로 내가 있었던 미팅에서 있었던 일이다.
난 성격도 급하고 액션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룹토론은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냥 파워 있는 리더가 위에서 디렉션을 내려주면 다음 리더가 업무를 받아서 하면 되는데 굳이 자리에 앉아 모든 이의 의견을 들어야 하겠다니 미팅은 8시간이 넘어가고 우리 이건 내일 다시 이야기해!로 하루가 다 지나가기도 했다.
간단한 정보를 알려주러 임원 미팅에 참석했는데 15분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질문 없어? Any questions?라고 했더니 나한테 질문은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갑자기 그룹토론을 하는 것이었다. 첨엔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싶다가 시간이 지나가고 다리가 아파 나도 자리에 앉아버렸다. 대화의 내용은 이미 나도 모르는 주제로 넘어가고 있었기에 30분 정도가 지나고 눈치를 보며 너희 질문 없으면 난 이만 나갈게 하고 나온 적도 많다.
이 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유튜브 비디오를 봤는데 전쟁터에서 상대방이 공격을 하니 이 나라 군인들끼리 네가 쏠 거야? 내가 쏠까? 이야기하다가 우리 그룹토론을 하자 let's have a group discussion 라며 자리를 깔고 앉는 짧은 비디오였다. (물론 웃자고 만든 비디오지만)
이러하다 보니 채용은 더디게 진행된다. 후보자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한 명 한 명이 모든 코멘트를 하고 싶어 한다. 2차, 3차 면접 일정을 위해 다음 스케줄을 잡는 것도 쉽지 않다. 제발 처음에 계획한 데로 따라주면 좋겠는데 미팅이 많으니 일정은 계속 늘어진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개인의 의견이 모두 소중하다고 받아들여지다 보니 어떠한 질문도 회의 중에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눈치 보면서 입 다물고 일을 하지 않고 일을 하다가도 잘못되었다 생각되면 미팅을 소집한다. 의견을 묻고 개선해 나가려 한다. 계획이 한 사람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계획 수정을 할 때 기분 상할 일도 없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언젠가 내 매니저가 이 회사를 계속 다니는 이유에 대해 나에게 물었고 나는 가장 나 다울 수 있는 회사이기 때문이라 답했다. 난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이다 보니 한국 회사에서는 화병이 날 정도로 답답했는데 여기서는 적어도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