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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Jun 10. 2023

탈퇴한 사용자입니다

소중했던 것도 잊을 만큼 뭐가 그리 급했을까... 잊혀진다는 것은 뺨에 스치우는 바람 소리 같다.


   얼마 전 창고를 정리하다가 예전에 쓰던 자그마한 미니 노트북을 발견했습니다. 몇 년 동안 존재조차 잊고 있었죠. 언제 샀는지 왜 그동안 안 썼는지 기억나질 않습니다. 조심스레 전원을 켜보니 여전히 작동하는 겁니다. 모니터 화면이 켜지며 한참을 애쓰던 녀석은 ‘나 멀쩡해!’라고 소리치듯 익숙한 창문 그림으로 저를 반겼습니다. 


  한때 ‘아이러브스쿨’이 유행했습니다. 그걸 통해 어린 시절 친구를 많이 찾았죠. 그 무렵 주말 종각에 가면 “어! 너!”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립니다. 살아가며 자연스레 잊히던 친구를 애써 다시 찾아 옛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잠시나마 현실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천진난만했던 그 시절로 저를 돌려보냅니다. 


  오래전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저에 대해 잘 아는 듯한 그녀는 조심스럽지만, 꽤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연락을 해 온 겁니다. 너무 반갑다며 말이죠. 그런데 기억나질 않았습니다.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 난감했습니다. 답장해야 하는데 자꾸 망설여집니다. 혹시 다른 사람을 저인 것으로 착각한 건 아닌지,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자신의 사익을 취하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습니다. 


  미니 노트북의 탐색기를 열고 폴더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폈습니다. ‘어! 이런 사진이…’. 제가 찍은 것 같지만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의 사진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꽤 많은 동영상과 각종 자료가 남김없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수중분만으로 낳은 아들의 분만 영상이 있어 놀랐습니다. 엄마에게 안긴 아들의 탯줄을 자르던 그 느낌이 되살아났습니다. 2001년의 저는 턱선이 날렵했네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주말마다 종각에 갔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때마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의 기억이 왜곡된 걸 알게 됩니다. 생각지도 않은 사과를 해야 했고, 본의가 뭔지도 모를 오해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웃고 울며 우리의 소중했던 시간을 다시는 잊지 않겠다며 다짐을 해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친구라서 좋았던 어린 날의 순수함이 현재의 우리를 따뜻하게 해줄 거라 믿으면서 말이죠.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일을 보낸 지 몇 달이 흐른 어느 날, 옛 동네를 우연히 지나갈 일이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아빠 어릴 적 얘기를 해주던 그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느닷없이 그녀가 생각이 났습니다. 2년이나 같은 반이었고 거의 매일 그녀의 집에 가서 놀았던 기억이 난 겁니다. 특이한 구조의 이층집이었고 꽤 부잣집이었습니다. 중간에 멀리 전학을 가야 했던 그녀를 위해 친구들과 환송식을 했었습니다. 이듬해 방학에 부모님을 졸라 저를 보러 왔던 그녀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못난 기억력으로 인해 속상했습니다. 너무 미안한 나머지 서둘러 메일을 보내봤습니다. ‘탈퇴한 사용자입니다.’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이 미안함을 전달할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한때 서로의 추억이었던 그 시간은 길을 잃고 색이 바래졌습니다. 창고를 정리하다 우연히 찾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더 안타깝습니다. 사과하고 다시는 잊지 않겠다며 다짐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중년이 된 그녀의 삶 가운데 저로 인한 상처가 깊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말 미안하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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