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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Jun 07. 2023

말미오름보다 알오름


오름마저 춤추게 하던 너, 이제 나를 춤추게 해줄래?


  첫 번째 올레길 도전은 비바람으로 포기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딸이 새로 사준 비싼 등산화, 부산에 사는 후배에게 협찬받은 유명 등산복. 이른 아침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부질없는 준비였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나마 공항에선 부슬부슬 오는 비에 희망을 품어 봤습니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도착한 시흥리 마을 입구 정류장에서 저는 고민했습니다. 비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비가 정면으로 들이치며 왔습니다. 우산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비옷을 입었지만, 고개를 제대로 들 수도 없었습니다. 태풍까진 아니어도 그 비슷한 상태였습니다.

 

  비바람과 안개를 헤치고 도착한 여행자센터에서 잠시 비를 피했습니다. 그 안은 날씨 탓인지 습하고 눅눅했습니다. 전 비옷을 벗고 몸을 녹이며 천천히 안을 구경했습니다. 여러 가지 기념품과 올레길에 관한 안내서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친 전 잠시 쉬며 숨을 고르기로 했습니다. 잠시 후 날씨 앱을 통해 확인해 보니 한두 시간 후면 그친다는 예보입니다.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다고 느낀 순간 창밖을 봤습니다. 문득 이 비가 그치지 않을 거란 강력한 예감에 휩싸였죠. 맞았습니다. 더 옵니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그해 가을에 다시 간 제주는 좋은 날씨로 저를 반겨줬습니다.  재도전한 올레 1코스는 시작부터 가파른 계단으로 살짝 주눅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맞이한 말미오름 정상의 풍경은 그간의 불편했던 마음을 순식간에 우주 저 멀리 던져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던 그 광경은 잊히지 않네요. 정상의 기분을 만끽하고 올레길 표시를 찾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알오름에 가기까지 길이 좁고 돌들도 많았습니다. 헛디딜까 봐 조심조심 걸었습니다. 


  평일이어서 올레길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 혼자 걸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걷다 보니 이상했습니다. 제가 땅만 보며 걷고 있던 겁니다. 마침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들어 이마의 땀을 식혔습니다. 그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잊지 못합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풀들 사이로 바람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자기를 봐 달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흔들어 댑니다. 아래에서 위로 좌에서 우로 쏜살같이 방향을 바꿉니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게 진심을 담아 반갑게 손짓합니다. 안녕!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혹시 사고나 문제가 생길까 걱정하며 오늘을 버텨냈습니다. 무사히 하루를 마치면 뿌듯했습니다. 제가 할 일은 돈 버는 일이라 생각했죠.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면 한 달, 일 년이 됩니다. 매년 연말이면 시간 참 빨리 간다며 푸념합니다. 돌부리에 넘어질까 두려워 땅만 보며 올레길을 걷듯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진작 고개를 들었어야 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고 가족과 친구가 있음을 잊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한정적입니다. 내일이 보장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동안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삶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요. 진심을 담아 저를 바라봐 주던 가족과 친구에게 소홀했습니다. 마치 그렇게 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이 정답인 것처럼 말이죠. 바삐 가던 길을 잠시 멈춰 서봅니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봅니다. 더 가져야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미 전 많은 행복을 곁에 두고 있었네요. 고개를 들어보니 그제야 웃음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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