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1
'느닷없이 속초를 떠났다. 서울에 돌아온 지 하루. 무엇을 할지 생각하다가 가고 싶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고민 없이 항공권을 구입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있던 호텔과의 재계약이 불발되고 난 실업자가 되었다. 10개월여의 속초 생활을 접고 그동안 꽤 쌓였던 살림살이를 꾸역꾸역 차에 싣고 서울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재회한 지 하루 만에 난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이번엔 더 멀리 스페인으로 가보자. 10년 전 막연히 꿈꿨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갈 절호의 찬스였다. 2주 정도면 준비기간으로 충분하다고 느껴 5월 16일 출국하는 항공권을 구입했다. 돌아오는 날짜는 음…. 6월 30일이 적당하네. 왕복 항공권이 준비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동안 잊고 있던 순례길 관련 인터넷 카페에 다시 들어가 기웃거렸다. 유튜브에서 준비 과정 영상도 보고 각종 블로그도 찾아봤다.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매일 오는 각종 택배로 빈 상자가 쌓여갔다. 딸이 나를 힐끗 보며 한마디 한다. “이민 가?”
필요한 것은 다 샀다. 최소한의 짐으로 배낭을 꾸리라는 한결같은 목소리에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귀를 닫고 있었다. 혹시 필요하지 않을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내 배낭에는 쓰잘머리 없는 물건들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묵직한데? 배낭을 들어본 나는 무거운지 적당한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본 한 블로그에 이런 글이 있었다. ‘첫날 내 배낭 안의 짐 절반을 버렸다’. 그래 난 순례길을 가는 거지 관광을 가는 게 아니다. 모든 물건을 꺼내고 다시 선별 작업을 했다. 겉옷과 속옷 각 세 벌, 양말 세 켤레, 필터가 장착된 물통, 우비, 등산스틱, 상비약, 세면도구, 슬리퍼, 패딩 조끼 한 벌, 빨랫줄, 자물쇠와 와이어, 팔토시, 종아리 밴드, 바람막이 여름용 한 벌, 봄가을용 한 벌, 모자, 장갑. 그리고 순례가 끝나면 신을 가벼운 운동화 하나.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슬슬 겁이 난다. 내가 끝까지 잘 걸을 수 있을까? 무릎에 이상이 오면 어쩌지? 중간에 다치면? 낯선 곳에서 말도 안 통하는데 어떡하지? 영어 공부 좀 열심히 할걸! 걱정거리가 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수십 가지는 생각났다. 그래, 이왕 마음먹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죽기야 하겠어? 가보자! 준비는 끝났다.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잰 배낭의 무게는 7.5kg! 딱 적당했다. 정확히 내 몸무게의 십 분의 일 정도였다. 참고로 내 짐 중에 필요 없던 건 빨랫줄과 자물쇠, 와이어였다. 뭐가 든 게 없어서 그런지 도둑도 배낭엔 관심이 없었다. 들고 있는 휴대전화만 조심하면 되었다. 처음 가는 유럽. 그것도 혼자. 이제부터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면 안 된다. 걱정과 기대와 설렘을 안고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