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꽃잎 몇 장쯤은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이기철

by 소걸음

14. 꽃잎 몇 장쯤은/벚꽃 그늘에 앉아보렴-이기철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레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기철, 민음사(2000.8.30)




이기철 시인의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을 읽고 쓴 답시 – 꽃잎 몇 장쯤은

꽃잎 몇 장쯤은

벚꽃길 걸어보자

아무것도 아닌 얼굴로

꽃그늘에 잠시 앉아보자


화사한 길 끝에서

다시 돌아가겠지만

꽃잎 몇 장쯤은 데려가자


봄은, 겨울을 건너온 몸

살아남은 우리가

조용히 피워 올린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