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

by 나하나

에너지가 많든 적든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태도가 건강한 관계를 만든다. 나님과 무거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서로 기분이 상할 수도 있고, 싸울 수도 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감정과 나의 일상을 나눠야 사랑을 쌓아갈 수 있다. 감정과 일상을 나누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암만 생각해봐도 나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내 마음속 두 감정을 살펴본다.


나님은 어제 오후 스킨십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님이 원치 않은 스킨십을 전 남자 친구가 했고 그 때문에 받은 상처로 누군가를 만나기 두렵다는 내용이었다. 몇 번 말로 들었지만 구체적인 순간과 이후 나님이 받은 고통에 대한 묘사는 밤잠을 설치게 했다. 내가 가한 폭력의 순간도 떠올랐고, 그 순간 나님이 겪었을 혼란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잘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나누는 몸의 대화를 섬세하게 만들어가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나님이 용기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놔줘서 내가 모르는 감각에 대해 생각한다. 남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폭력의 디테일을 내 경험으로 돌아보면서 상상한다. 나님의 두려움을 나님을 안고 있을 때 느껴지는 떨림으로 순간순간 짐작해본다. 나님이 겪었을 시간을 살아낸 적 없는 나는 그 고통을 1/100도 이입할 수 없겠지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쓴 신형철의 말처럼 감정 이입할 수 없는 걸 인정하고 공감의 농도를 높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지난밤 꿈이 뒹숭생숭 했던 모양이다. 아침에 나님이 전화가 와서 기쁜 마음으로 받았는데, 마음과 달리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괜찮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지 않은 것 같다는 말에 어제 글을 봤다고 했다. 나님은 조금 뻘쭘해했고 나는 조금 피곤했고, 나님은 이야기하기를 망설였고 나는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을 했는데, 어차피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고 나는 기분이 상해 불편함을 드러냈다.


나님이 용기 내어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는 순간에는 나님을 오롯이 감싸줘야 하는 게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나는 나님의 말 한마디에 불편함을 표현했다. 두 감정이었는데 나님이 겪었을 시간들을 생각하면 안쓰럽고, 나와 함께 보낸 시간에 내가 가한 폭력의 순간이 떠올라 미안했다. 그리고 '어차피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서운함이 몰려왔다.


왜 서운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중이다. 나에 대한 믿음이 높지 않다는 것, 나를 전 남자 친구와 같은 취급을 한다는 것, 나에 대한 기대가 많지 않다는 건 나님이 살아온 시간들을 톺아보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본능이라는 걸로 이해할 수 있다. 나님의 상흔을 알고 있다더라도 나는 실수를 할 것이기에, 따끔하지만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내가 같은 실수를 하고, 기대하지 않은 순간이 왔을 때 마음의 생채기가 난 나님은 어디에 있을까? 상처 받은 마음 안고 '남자와 세상은 다 그렇지!'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갈까?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실망도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일까? '내가 뭘 잘못을 했기에 저 사람이 나한테 이러나?' 물으면서 스스로를 탓할까?


나는 과거의 나님처럼 나를 밀쳐내고 자신에게로 화살을 쏘는 나님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님을 보호하기 위한 말이기도 하지만, 나를 밀어내는 말이기도 하다는 걸 나님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님과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상대를 이해하고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혹 실수를 하더라도 차분히 그 실수를 들여다보면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다. 각자가 오롯이 서고 우리 두 사람이 멋진 무대를 만들어 내길 기대하면서, 쉽지 않을 그 과정을 함께하자는 약속이다.


나님은 혼자가 아니기에 이제부터 더 행복한 '나', 더 나은 '우리'를 기대하면서 건강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애썼으면 좋겠다. 그동안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차갑게 밀어냈다면 상처를 감싸줄 거라는 기대 속에 미지근하게라도 껴안았으면 하는 바람에, 난 서운했다. 이런 감정을 잘 살펴보고 나누는 게 우리 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과정이라 믿고, 서운함에 머물지 않으려고 글을 쓴다. 나님은 어차피 함께 살 거라면, (나도 나를 바꾸기 위해 애쓸 테니) 달라질 자신과 우리를 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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