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의 녹음은 아름답고 답답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남편과 나는 서로 서운함을 알았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가 너무 고단함을 알고 이해하고 안쓰러워함을 서로 가지고 있음이기에 떠나는 게 쉽게 되지도 않는 나지만, 이왕 떠난다면 호텔 안에 머무는 여행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는 나다.
살인적인 근무 스케줄에도 떠나고 싶어서 여행에는 영 뜨뜻미지근한 부인 대신 혼자 이 여행을 준비하고 내내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수영을 하루 종일 해도 해도 모자란 아이들을 알기에 나도 그것에 맞추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방학 내내 아이들과 함께 하며 답답하고 여기와 서도 이렇게 보내고 있는 시간들이 드문드문 답답했다. 나는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는데. 남편도 사랑하는데 왜 이 먼 나라에 와서까지도 답답해하는가 요즘 용기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그 멋진 단어가 조금 무겁게 들렸다
안 닿는 줄 알면서 시도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었다
나의 엄마처럼 혼자 억세고 세상의 바람을 맞으며 힘들게 사는 삶은 나는 싫었다
남편의 보호와 사랑 안에 사는 것. 아이들 곁에 따뜻한 안정감으로 있어주는 삶.
나의 가정을 이루고는 바로 내가 원해서 선택해 온 삶인데. 왜 이제와 자꾸 답답해하는지.
안온하고 따뜻한 거실의 식탁 위에. 혼자 가만히 물러져 가는 토마토처럼 내가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어디로 어느 문으로 삐죽이 튀어나가고 싶은 걸까
나는 짧은 영어단어로 겨우 몇 마디를 하는데, 유창한 영어로 사람들에게 요청하고 문제를 말해서
방을 바꾸고 현지인들과 대화하며 우리를 여기저기로 데려가는 그에게서 그야말로 자의로 주도적으로 사는
삶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고마움으로 누리면 될 것을 식탁 위 물러져가는 토마토를 또 떠올리고 말았다
세부의 개방되어 있는 호텔 로비에서 노트북을 펴놓고 온라인으로 독서모임을 하는 내내 주위에서 청소하는 리조트 직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끝나고 노트북을 덮고 나니 텅 빈 로비에 나 혼자 앉아있었다.
결국 아무도 나에게 비키라고 하지 않았는데, 나는 왜 그렇게 눈치를 보느라 집중하지 못했나 후회가 되었다.
어둑해진 수영장에 비치는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들을. 춤추는 야자수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불어오는 세부의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여행 중 나에게 가장 좋았던 순간이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독서모임을 하겠다고 이 밤에 노트북을 챙겨 책가방을 매고 꾸역꾸역 나와봤기에 맞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내가 용기 낸 온전한 자의의 시간이었다. 알고 보니 남편도 내가 걱정되어 나와서 보고는 돌아가는 길에 불 꺼진 수영장에서 멍하니 한참 앉아있다 들어갔다고 했다.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애쓰고 자신을 가족을 위해 내어 주며 사랑하고 있음은 다를 바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 공항에서 가족들이 다 기념품을 샀다. 아무리 봐도 나는 사고 싶은 게 없었다.
그저 작은 거북이 인형이 자꾸 머리에 남아 뒤돌아 걸어가 계산을 했다. 나는 이곳에서 고래상어나 거북이나 이런 게 보고 싶었는데.. 사면서도 조금 속상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묵상집에 실린 한 초등교사의 글을 읽는데 또 점점 마음이 펴지는 것 같았다.
"... 토끼와 거북이를 같이 세워 놓고 경주시킬 게 아니라. 토끼는 토끼의 길을, 거북이는 거북이의 길을 가게 해야 한다. 비교는 아이를 무너뜨린다. 어른을 왜곡시킨다. 충성하는 마음을 삐뚤게 만든다. 생명은 비교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아이의 말을 기억하면 좋겠다"
작은 용기의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좀 느리고.. 내가 좀 답답하지.. 내가 토끼 쪽은 확실히 아닌 것 같고. 눈치도 많이 보는편이지. 토끼처럼 빠릿빠릿한 남편. 매우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많이 있지만... 뭐 그런 면이 나에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변할 수도 있지. 그리고 그런 삶들도 녹록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내가 지금 거북이라면. 용기 있게 거북이의 길을 가면 되지. 그 길을 엉금엉금 나답게 충성스럽게 가고 싶다. 엉금엉금이란 말 왜 이렇게 좋은가. 요즘 좀 부담스러웠던 용기란 말을 가벼워지게 해 준다. 이제부터 나에게 용기란 엉금엉금이다.
남편은 애들 커서 깊은 바다 덜 무서워하게 되면 그땐 고래상어 보러 꼭 다시 오자고 했다. 그럼 나는 거북이도 같이 볼 거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며 눈꺼풀이 처져있는 거북이 인형을 내 가방에 달았다. 참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