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나이테를 그려주고 있다

-색연필로 그리는 마당

by 나혜경

마당에 색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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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피는 꽃을 그리려고 찍어둔 사진을 찾다 보니 꽃과 새싹과 열매를 들여다보고 향을 맡으며 혼잣말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순간들이 참 많았음을 알게 된다. 맑은 날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생각한다. 언젠가 이곳이 아닌 곳에서 여기를 떠올린다면 슬플까 기쁠까.

몇 년 전 2월 어느 날 꽃집에서 작은 히아신스 화분을 하나 사 왔는데 꽃 색과 향에 취해 나도 모르게 스케치북을 펼치고 있었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깔은 색연필로 채웠다. 처음이라서 자신이 없어서였는지 색을 칠한 듯 만 듯 옅게 칠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때의 기분에 가 닿을 수 있고, 아직도 처음 그린 꽃 그림이 향을 뿜는 것만 같다.


그 후 꽃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특별히 그림을 배운 적이 없으니 그냥 제멋대로 그리는 그림이었다. 말하자면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취미가 생긴 것이다. 딸기꽃, 미스김라일락, 로즈마리, 수선화, 매발톱, 초롱꽃, 불두화, 백일홍, 옥잠화 등 마당이나 화분에서 피운 꽃을 한 송이나 두 송이씩만, 많은 시간 들이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게 그렸다. 비 온 뒤 촉촉한 꽃과 잎은 생기가 있어서 더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가 오고 나면 마당으로 나가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솜씨가 없어서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다 그려보고 싶은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울안에서 족히 100여 종의 꽃이 피고 지지 않을까. 사다 심은 것도 있지만 거의 얻어 심은 것이며 씨를 받아와서 심은 것, 씨가 날아와서 자란 것도 있다. 우리 집에 와서 마당의 식구가 된 것들은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 100가지 꽃을 피웠다면 몇백 번을 들여다봤을 것이다. 싹이 날 때부터 꽃봉오리가 맺히고 점점 커지는 모습과 만개했을 때와 또 지는 모습까지 바라보고, 한쪽 구석에서 피어도 꼭 눈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참 예쁘다고 어떻게 꽃을 피웠느냐고 고생했다고, 작년보다 꽃송이가 크다고 또는 작년만 못하다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송이가 작으면 작은 대로 그만한 이유가 있어 외면할 수 없다.


2018년 여름은 강렬한 햇빛과 가뭄이 한꺼번에 왔다. 물을 주다가 지쳐서 포기할 정도로 땅이 딱딱하게 말라 있었다. 오죽하면 지렁이들도 마른 땅을 견디지 못하고 다 밖으로 나와 말라 죽었으니까 말이다. 나무에 열리는 열매도 작고 잎사귀도 타는 듯했다. 물론 꽃도 잘 피지 못했다. 그래도 신기하게 염천을 뚫고 꽃을 피우는 녀석들이 있었다. 손으로 쓰다듬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꽃이 지고 작은 열매를 맺었지만, 다음 해에는 예년보다 꽃이 더 번성했다. 사람에게도 역경이 있듯이 식물도 추위나 더위, 천적을 만나면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식물도 사람처럼 고난을 견디고 나면 더 단단해지는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재능기부 하는 분의 카페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신이 그릴 것을 정해오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데, 그리다가 막히는 부분을 질문하면 조언을 해준다. 그때 2년 정도 혼자 그리던 꽃 그림의 부족한 점과 작고 세밀한 그림의 드로잉 기법과 색칠하는 방법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또 미술을 전공한 선생님은 작가들의 좋은 그림을 계속 보여주었다. 칭찬까지 잘 해주는 선생님 덕분에 그림 그리는 일은 노는 일처럼 재미가 있다.

선생님은 전공자들과는 다른 그림, 그러니까 서툰 그림의 또 다른 매력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자기만의 색깔이 있을 때 오히려 더 생명력이 느껴지는 건 아닐까. 그동안 설렁설렁 그리던 그림을 세밀하고 선명하게 그리려다 보니 손바닥만한 크기로 한 장 그리는데 두 시간, 세 시간 또는 그 이상도 걸리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 걸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보다는 훌쩍 지나가 버린다. 늦게 배우는 그림 공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건 그림의 또 다른 매력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콧노래를 부르며 그림을 완성해나가는 건 큰 즐거움이다. 그래서 일을 하다가 쉬고 싶으면 스케치북을 펼치곤 한다.

추위가 찾아오고 마당이 눈으로 다 덮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입춘이 오고 다시 바람이 훈훈하게 불어오기 시작하면 빈 도화지 같던 마당에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며 마당에 색칠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죽음을 이기고 돌아온 것들과 눈을 맞추고 스케치북에 하나씩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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