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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남이 May 10. 2020

일상에서 만나는 유토피아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고

토요일 오전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다시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초반 30분 정도는 밥을 먹으면서 보고 나머지 50분은 눈물을 훔치면서 보게 되는 드라마. 그렇게 주말을 유쾌하고 몽글몽글하게 시작한다. 요즘 최고 화재라는 '부부의 세계'와 비교를 해본다면 이 드라마는 그 자체로 '힐링'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야기를 모아둔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제고 꺼내먹고 싶은 진짜 이야기들을 모두 모아놓은 곳. 드라마 곳곳에서 진주알들이 반짝반짝거린다.



숲 속의 한 그루 나무처럼


병원이라는 숲에서 각각의 캐릭터들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쑥쑥 자란다. 드라마는 숲 전체를 조망하며 하나의 큰 주제를 전달하기보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에 애정을 담는다. (그래서 다소 정신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고). 숲을 크게 보면 같은 나무인 것 같지만 숲 좀 걸어 본 사람들은 안다. 숲에는 볕을 잘 받아 양지바른 곳에서 쑥쑥 잘 자란 나무도 있고, 다른 나무들 틈새에서 어렵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도 있다. 혼자 외딴곳에서 크고 있는 나무, 햇빛을 따라 몸이 굽어 있는 나무, 뿌리를 아직 덜 내린 나무, 다른 나무에 기생하는 나무 등 자세히 보면 똑같이 자란 나무가 없다. 제주도에서 숲 해설가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숲 속 나무들의 생김새나 특징은 모두 그들이 살아온 환경에 기인한다고 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나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학교, 회사, 집, 사회라는 숲에서 한 그루의 나무 자기만의 숙제를 풀면서 성장하고 있다. 드라마는 5명의 주인공뿐 아니라 병원의 모든 캐릭터들이(심지어 단역들까지) 각자의 위치나 상황에서 고민하고 커가는 과정을 그린다. 문득 회사라는 내 숲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내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어떤 때 나는 아웃 포커스 된 배경이기 하다.  그렇게 각자 부지런히 광합성을 하고 있다 생각 하니 회색빛 공간인 회사가 푸른 생명체로 느껴진다.


나무 한 그루 한그루에 집중하다 보니 이 드라마에는 자극을 담당하는 '악역'이 없다.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경험하고 부딪히고 깨닫게 될 뿐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  






슬기로운 앞담화 생활


여기가 무릎이 닿기도 전에 교수님들의 첫사랑부터 지병까지 쫙 읊어 준다는 봉샘 살롱인가요?


열심히 앞담화 중인 봉샘 살롱


율제 병원에는 '봉샘 살롱'이 있다. 이곳에서는 병원 사람들의 뒷말 아니 앞말이 오고 간다. 주인공 5명에 대한 과거와 현재가 봉샘 살롱의 주 관심사다. 그런데 목적이 슬기롭다. 함께 일하는 동료를 더 잘 알기 위해 정보를 주고받는다. 그 사람이 '좋다, 나쁘다, 별로다, 아니다'의 평가가 아닌 성향을 알기 위해서다. 단점보다는 장점에 더 집중한다. 서로 더 잘 지내보기 위해 호기심을 가지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아마 현실의 살롱도 뒷말과 앞말 그 어디쯤일 것이다. 요즘은 사회에서 만난 사람과 사생활을 나누거나 궁금해하는 것이 선을 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후배에게 '주말에 뭐 했는지'를 물어보는 일도 때론 조심스럽다. 호기심과 무례함을 구분 짓는 차이는 뭘까. 슬기로운 생활에서 대부분의 대화는 "원장님 소식 들었어?, OO선생은 무슨 일이 있었대?" 등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제3의 인물에 대한 사연을 비밀스럽게 나누지 않는다. 누군가의 '나쁜 소식'은 약점이 아닌 위로와 격려의 대상이 된다. 이 드라마는 아마도 성선설을 믿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실에서는 '봉샘 살롱' 보다 부부의 세계 '여우회'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이기도 하는데 말이다.



슬기로운 꼰대 생활


이 드라마 최고의 캐릭터 조정석은 막내가 사 온 도시락을 보고 선배 교수가 구시렁거리자 이렇게 말한다.  


교수님, 교수님은 맨날 그렇게 차려진 것만 드시면서 말씀이 많으시더라. 그냥 드세요. 맛있기만 하구만. 이제 교수님, 한 마디 할 때마다 만원, 만원씩 내세요.


4만 원 적립한 조정석


무례하지 않 귀엽게 꼰대를 무찌른다. 실습하러 온 학부생들에게 '아부지 뭐하시노, 어디 사노' 하며 호구조사만 하고 가버리는 (회사로 치면) 부장급 교수들에 반해 조정석은 '실습은 재밌는지, 어떤 노래를 주로 듣는지' 등을 물어본다. 두 관심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한다. 그렇다고 꼰대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악의가 있는 질문이 아니다. 다만 약간의 배려 없음에 귀엽게 응수하는 슬기로운 선배를 보여줄 뿐이다.


좀 더 정중한 에피소드도 있다. 선배 교수 A는 교수생활은 오래 했지만 TSA라는 수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인지 그 수술을 본인이 하겠다고 나선다. 수술의 난이도와 숙련도를 따져봤을 때 A보다는 전미도(또 다른 존멋 캐릭터)가 하는 것이 훨씬 환자를 위해 좋은 선택이지만 선배 A를 대신해 수술한다고 하는 것은 하극상이다. 여기서 슬기로운 전미도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교수님, 수술 제가 어시 하겠습니다. 제가 그 수술이 아직 좀 부족해서요. 기회 주시면 옆에서 보면서 많이 배우겠습니다.


손마저 공손한 전미도


이런 센스를 보았나. 꼰대라고 불리는 기성세대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무턱대고 '도저언~' 하기보 좀 더 나은 언어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대스러움에 침묵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매너 있게 부딪혀 보는 용기있는 방식.  슬기로운 생활이 '기성세대'를 다루는 방식 참 영리하다.




슬기로운 친구 생활


오늘은 뭐 먹어? 서로 밥 챙겨주는 친구들


주인공 5명은 과거와 현재를 모두 함께하는 친구들이다. 20대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고 같은 업에서 같은 회사를 다니며 심지어 취미 생활도 함께한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같이 이어갈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서 시작해 학교를 가고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이루며 각자의 갈림길로 걸어간다. 달라진 위치에서 관계를 예전처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 너무 잘 안다. 옛친구는 추억에만 머무르게 된다. 그러니 이 우정은 얼마나 슬기로운 것인가.




 

슬기로운 생활은 슬기로운 관계에서 온다. 서로의 인생에 낄끼빠빠가 되어주는 사이. 관계의 레이더를 늘 켜 두고 애정의 선 넘기를 해주는 사이가 있으면 버티고 살아볼 만한 인생 아닐까. 이 드라마는 현실에서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에피소드로 유토피아를 그린다. 이쯤 되면 부부의 세계가 비현실적인지, 슬기로운 생활이 비현실적인지 헷갈리지만 계속 꺼내보고 싶은 이야기가 '슬기로운 의사생활'인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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