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카페 디자인 스탭 출신의 덕질 회고록
어렸을 때부터 나는 반골 기질이 있었다. 남들 다 하는 건 하기 싫었다. 친구들과 달리 학원을 가지 않고 자기 주도 학습을 했고, 커서도 대기업보다는 스타트업 취업을 준비하며 조금은 다른 길을 걷는 걸 좋아했다. 이런 기질은 덕질에서도 유효했다. 학창시절엔 동방신기, 빅뱅, 슈퍼주니어 같은 2세대 아이돌이 인기가 많았지만, 나만 유일하게 1세대 아이돌을 좋아했다. 그 이름은 바로 '신화'였다.
첫 시작은 <논스톱 4>였다. 고시생 역할을 하던 앤디가 눈에 쏙 들어왔다. '아시다시피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인해 청년 실업이 40만에 육박하는 이때...'라는 냉철한 대사와 한예슬을 짝사랑하며 딸기우유를 건네던 수줍은 모습에 반전 매력을 느꼈달까. 그 후로는 <X맨>이나 <연애편지>를 보면서 유난히 다른 다섯 명과 붙어 다니는 걸 보고서야 앤디는 그룹 신화의 멤버라는 걸 알게 됐다. 계속 보다 보니 정이 들어 자연스럽게 신화창조(신화 팬클럽 이름)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어찌 보면 친구들보다 미디어를 빨리 접한 결과였다.
생각해보면 지금은 아이돌의 수명이 길어졌으나, 그때만 해도 오래 그룹 활동을 유지하는 아이돌이 적었다. 그래서 그 당시 멤버들 모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장수 아이돌 그룹'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나이 든 오빠들을 좋아하는 거 아니냐는 주변의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오빠들을 롤모델이라고 말하는 그룹들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며 내적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흥. 너희 오빠들은 안 늙을 것 같아? 언제까지 활동할 수 있나 보자.' 하는 심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롭기도 했다. 우리 오빠들의 매력을 함께 나눌 친구들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은 곳이 팬카페였다. 다음(Daum) 팬카페에는 정말 1세대 아이돌이 전성기 때 입덕 한 언니들이 많았다. 그나마 네이버에는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들이 많아 적응하기 편했다. 무엇보다 2세대 아이돌을 좋아하는 또래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본질이 비슷해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OTT나 유튜브 플랫폼이 없었기 때문에 팬질을 할 수 있는 거리가 지금만큼 많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팬카페에서 친한 사람들끼리 팸을 만들어 서로 가지고 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공유하고, 아는 정보가 생기면 아낌없이 나눴다. N드라이브가 쉴 날이 없었다. 그때 활동을 워낙 열심히 했고, 우리 오빠들 예쁘게 꾸며줄 거라며 독학으로 포토샵을 배웠다가 팬카페 디자인 스탭 자리까지 오르는 영광을 맛보았다.
우리만의 재미있는 놀이도 있었다. 카톡이 없던 시절 친한 팬카페 회원들의 폰 번호를 다 저장해놓고 있었는데, 데뷔일이나 멤버들 생일이 다가올 때마다 우리들만의 이벤트를 준비했다. 바로 문자 돌리기였다. 글자 수 제한 80자 안에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단어와 이모티콘을 끌어와 최대한 성대하게 써야만 했다. 일주일 전부터 고민해서 미리 써둔 뒤 기념일 12시가 되는 순간 주요 팬카페 회원들에게 단체 문제를 보냈다. 그때 다른 회원들이 보낸 문자들도 동시에 쏟아지는데 희열이 느껴졌다. 때론 나보다 더 화려하게 꾸민 문자를 볼 때면 '아, 나는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다음엔 더 잘 써봐야지!'하고 결심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귀여운 경쟁이 아닐 수가 없다.
또 그때만 해도 팬카페 컬러에 굉장히 민감했다. 지금이야 응원봉이나 심볼이 너무 다양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룹 컬러가 담긴 '풍선'이 주는 의미도 남달랐다. 신화창조하면 주황공주, 주황공주하면 신화창조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응원봉에 주황색을 쓰는 다른 팬클럽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이미 1세대부터 2세대 초기 아이돌들이 빨주노초파남보부터 웬만한 색은 다 장악한 상태였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땐 우리의 주황색을 뺏긴 기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의 색을 지키기 위한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캠페인 급이었다. 나 또한 가만히 있을 순 없었기에 관련 글을 퍼다 나르곤 했다.
애석하게도 내가 좋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멤버들이 순차적으로 군대를 갔다. 다행히 몇 멤버들의 솔로 활동이 이어져 버틸 수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4년 만에 그룹 완전체가 컴백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감격에 차올랐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에 콘서트를 꼭 가보고 싶어 부모님을 졸라 드디어 오빠들을 영접했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따라 부르고 주황색 봉을 흔들던 때가 잊히질 않는다. 그렇게 남은 고등학교 2년을 그 기억으로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드디어 내 돈으로 콘서트를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 후로도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점점 세상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사실 이전만큼의 열렬함은 없다. 그간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대외활동도 하고, 이젠 취업을 넘어 이직도 한번 했다. 그 사이 멤버들도 하나 둘 결혼을 했고 각자의 삶과 커리어를 쌓고 있다. 나도 그들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난 1n 년의 시간이 내 삶에 또렷이 남아있는 건 똑같다.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했던 첫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느낀 애정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찾아 듣진 않지만 가끔 플레이리스트에서 그들의 노래가 툭-하고 튀어나올 땐 가슴이 뛰기 시작하니 말이다.
덕질은 현재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불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것을 좋아한다. 멤버 교체 없이 오랫동안 무대를 지킨 그룹이기 때문에 그들의 팬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영원함'이란 가치를 사랑했다. 물론 정말 영원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팬질은 진심이었고 아마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 순간만은 변치 않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 당시 같이 활동했던 팬카페 회원들은 이젠 진짜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다. 여전히 단톡방이 있고 이젠 만나서 오빠들보단 우리의 인생 얘기를 하는 관계이다. 올해 초에는 그중 한 명이 결혼을 해 다 같이 다녀오기까지 했다. 언젠가 우리 중 누군가 결혼하면 신화 노래로 축가를 불러주자고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 현실이 됐다. 물론 일코 하느라 축가는 못했지만.
열렬한 덕후 생활은 막을 내렸지만, 지금도 그들은 여전히 내 삶 곳곳에 남아있다. 누군가 다시 한번 무언가를 그만큼 좋아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애석한 웃음만 지어 보일 것 같다. 그런 경험은 흔치 않다는 걸 이젠 안다. 경험이라도 해봐서 다행이지 싶다. 잠시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오빠들, 그리고 그들이 인생의 전부인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추억해본다.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에서 빛이 났구나. 어쩌면 그들을 사랑했던 내 모습을 좋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한 열정으로 온 마음을 다 했던 시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