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니 박
창경궁 연리목 아래 벤치로 정했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일어날 곳이 될 것이다.
나는 하루 전 일을 기억해 내려면 5분은 골똘히 생각해야 하는 수준의 기억력을 갖고 있다. 기억력과 관련해서는 누가 새대가리라고 놀려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이 일 만큼은 절대로 기억에서 사라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녀는 사람이 많고 복잡한 곳에서 동네 사람들 모두 보라는 듯이 프로포즈를 받으면 무조건 도망가 버릴 거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곤 했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프로포즈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던 것이다. 이 미션을 받아든 그 때를 다시 생각만해도 눈 앞이 아득해지면서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그 미션을 해내야만 했고, 주여 그 완벽한 장소를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인터넷 세상을 다 뒤졌다.
유레카! 세상에 연리목이라는 것이 있다더라. 두 개의 나무가 따로 자라서 하나의 줄기로 합쳐지는 나무. 결혼 프로포즈에 이보다 더 좋은 의미부여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그렇게 찾아낸 장소가 사실은 우리가 가장 좋아했고 가장 자주 가던 장소 창경궁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미 우리 가까이에 있었던 것을 나는 멀리서 애써 찾았던 것이다.
그렇게 먼 곳을 찾고 찾아 결국 다시 우리의 최애 데이트 장소 연리목 아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종로 5가 귀금속 전문점 어디서 사온 목걸이를 목에 서툴게 걸어주며 Ra.D의 I’m in Love를 프로포즈 송으로 불러주었다. 매우 아마추어처럼. 노래를 부르던 중간 중간에 창경궁 산책을 즐기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지나갔다. 그녀는 평소에도 부끄러울 때면 얼굴에서 피가 날 것 같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 날은 프로포즈 의식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말인데, 사실 나는 그녀에게 그 이벤트가 좋았는지 어땠는지 아직까지도 감히 물어보지는 않고 있다. 기나긴 프로포즈 의식이 끝나고, 우리는 누가 볼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고, 남들처럼 창경궁 숲길 사이로 사라졌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클리셰인가 싶다. 연두색 숲이 무성한 나무 아래 벤치, 그리고 프로포즈하는 두 연인의 흔적. 하지만 그 클리셰 덕분에 그 때 그 장소는 내게 ‘오월의 숲’으로 남았다. 사실, 그 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오월의 숲’이 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