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현, ‘우리 다음에 내려요’
전시를 보고 집에 돌아와 청소기를 돌렸다. ‘아내가 일하고 돌아오기 전에 청소를 끝내야지’ 참 묘하다. 청소기 주둥이가 거실 바닥의 머리카락을 빨아들일 때면 내 머릿속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생각들도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간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명상의 시간이다.
이제 막 몸에 땀이 날 때쯤,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한 그림이 떠올랐다. 버스를 타고 있는 사람들 그 중에 나를 보고 손을 흔드는 한 남자. ‘어 왜 이러지? 나는 분명 다른 그림으로 에세이를 쓰려고 했는데…’ 거실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빨아들이면서 그 그림을 골똘히 그려본다. 버스를 탄 한 사람이 나를 보고서 활짝 웃으며 머리 위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이 사람 나를 보았구나!’ 갤러리에서 나는 그를 그냥 지나쳐 다음 그림으로 넘어갔는데.
칠흑같은 밤을 살아왔다. 별처럼 빛날 미래를 바라보면서.
“여보 조금만 기다려. 내년엔 변화가 생길거야.” 그렇게 10년을 지내왔다. 아니 평생을 그렇게 보내왔다. “대학 갈 때까지 3년만 참어. 그때가서 맘껏 놀아” “취업할 때까지만 참어. 그때가서 연애도 하고 그래” 현재를 팔고 미래를 샀는데 약속 어음은 언제나 부도나게 마련이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을 해오면서 이 곳에 내 미래가 있을까 기대했다.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저녁 8시에 퇴근하고 퇴근 후에도 12시까지 일했다. 혁신 대안학교의 담임교사, 교육혁신부장, 학생지도부장으로서 생각하는 수많은 아이디어들을 현실화하면서 학교의 미래와 그 안에 있는 나의 미래를 그렸다. 하지만 더 이상 학교와 함께 갈 수는 없게된 지금, 나는 스쿨버스에서 홀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가 되었다.
계획에 없던 하차. 한 두달간 나는 알 수 없는 편두통과 불면을 경험했다. 모든 것을 불태웠는데 내게 남은 것은 없었다. 그러던 중 구청에서 하는 강좌를 신청했다. 제목은 ‘번아웃과 무기력’이다. 강사이신 김경일 교수님이 말한다. “여러분 행복하기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하셨죠? 아니예요. 매일의 행복을 기록하세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기록하세요. 그 행복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겁니다.”
맞다. 일을 마치고 집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향해 “아빠!” 소리치며 두 팔 벌려 달려오는 두 딸의 눈 빛을 볼 때 나는 다시 살아났다. 오늘 하루 있었던 속상한 일 좋았던 일을 이야기하는 아내의 눈을 볼 때 나는 다시 살아났다. 학교 수업과 학생들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던 선생님들과 얼굴을맞댈 때 나는 살아났다.
돌이켜보면 나를 살게한 것은 커다란 일을 이루고 멋진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버스에 탔지만 한 방향만을 바라보느라 눈도 마주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금 여기 나와 마주한 사람들의 눈을 보고 그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것, 그들의 삶을 껴안는 일이 나를 살아있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림의 그 사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지 않았다. 분명 손을 흔들었는데.
아 그래. 내가 먼저 손을 흔들어 줘야지. 오늘을 선물해줘야지. 나에게도 그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