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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스키 Mar 06. 2024

끝난 것들

무겁게 보일 수 있지만 쓰는 마음은 전혀 무겁지 않았어요


  맞은 자리는 매의 모양대로 붓는다. 몇 시간이 지난 뒤 본 팔뚝이나 허벅지는 울퉁불퉁하게 부어올라 만져보면 밭고랑 같다. 어느 날은 그걸 만지면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프고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엄마가 미웠다. 최고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맞으면서도 나는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에게 최고의 상처를 주는 방법은 내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겁이 많았고 죽음의 방법을 다양하게 상상하다가 진짜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엄마의 키를 훌쩍 뛰어넘을 무렵 그 시간은 끝났다.


  전후세대의 많은 부모들은 육아의 갈피를 잡지못하고 찐득한 사랑과 폭력을 동시에 행사했다. 어른이 되고 동세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그 폭력의 형태가 얼마나 다양한지 알게 되었다. 나의 경우는 그나마 단순한 쪽인, 예고 없이 날아오는 매질과 폭언이었다. 그때는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맞고 오는 친구들은 많았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은 매를 들었다. 엄마의 매는 어떨 때는 엄격한 훈육에 가까웠고 어떨 때는 폭력에 가까웠다. 거짓말을 했다고, 동전을 훔쳤다고 맞았다. 다이어리를 꾸민다고, 발 매트에 물을 털었다고, 말대꾸를 했다고 맞았다. 짧게 자른 고무호스가 가장 아팠다. 고무는 살에 감겨서 맞자마자 부어올랐다. 다행히 나의 원망은 스스로를 향하지는 않았다. 입으로는 잘못했다고 하면서도, 진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신경줄이 굵게 타고난 건지 아니면 맞으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길러진 생각의 기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에 매의 자리는 크지 않다. 엄마와 좁은 소파에 지그재그로 누워 서로의 발을 간지럽히던 순간. 마당에 있던 봉숭아꽃을 따다 빻아 내 손톱에 랩으로 칭칭 둘러싸 주던 순간. 시장에서 가래떡을 사 나무젓가락에 꼭꼭 끼워주던 순간. 그런 순간들보다 폭력의 자리가 크지는 않다. 그때의 엄마는 두 사람이다. 그 엄마와 나를 때리던 엄마는 마치 다른 사람 같다. 폭력의 기억은 굳이 숨긴 적은 없지만, 끄집어내야 나온다.


  나는 제법 순한 어른이 되었다. 아무에게도 폭력을 써본 적 없고 화도 잘 내지 않는다. 가끔은 의심스럽다. 이건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엄마처럼 되지 않겠다는 무의식이 만들어낸 가짜 온화함일까? 가짜라고 의심하는 나를 또 의심한다. 애초에 할 필요가 없는 의심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가끔 의심스럽다. 문득문득 느끼는 나의 소심함이, 비겁함이 사실은 그 폭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지금 와서 어릴 때 탓을 하는 것은 미성숙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나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라 그런 건 아무 트라우마도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트라우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것저것 헷갈리는 와중에 확실한 건 인간은 늘 모순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엄마의 사랑은 진짜였지만 밭고랑 같은 피멍도 진짜였던 것처럼.


  오은영의 콘텐츠들이 유행하고 다양한 육아론이 화면에 나오는 걸 보다가 엄마는 문득 사과했다. “너희를 너무 때리면서 키웠어. 그때는 저런 게 없어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몰랐어. ” 그 말을 듣고도 별생각이 들지 않아 그때 알았다. 이제 그 시간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아마도 엄마는 우울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사랑하지만 약한 존재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좌절했을 것이다.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에서 끝낸다.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의 엄마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의 깊은 곳은 회피한다.


  폭력은 어떤 형태로 남아있기보다는, 어떤 기회를 영원히 끝내버린다. 엄마와 나 사이에도 다른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살가운 자식이지만 나의 일부만을 발췌해서 보여준다. 집을 완전히 떠난 스무살 이후 엄마가 보는 내 삶은 발췌독에 가깝다.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를 엄마가 어떻게 채워 넣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내가 쓴 내용과 다르다고 오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엄마의 이야기 안에서 내가 불행할 때 엄마는 기꺼이 제 살을 갉아 나를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채워 넣지 않은 모습으로 내가 행복할 때 엄마는 그 행복으로 인해 불행할 것이다. 그 사실은 더 이상 나를 슬프게 만들지 않는다. 폭력은 끝났고 어떤 페이지는 접힌 채 펼쳐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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