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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스키 Mar 06. 2024

버려야 산다. <곤도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작년, 이사를 하며 써본 글입니다. 결국 저는 버리는데 성공했을까요?


  시월 이사를 앞두고 짐을 대폭 줄이기로 마음만 먹은 지 두 달째. 옷장을 열면 한숨만 나오고, 싱크대를

열어도 한숨만 나오고, 책장을 봐도 한숨만 나오고, 눈 돌리는 곳마다 한숨만 나와서 결국 흰 천장을 보며 눕게 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사 전 주말이 몇 번 남지 않은 걸 깨닫고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를 불현듯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 결심했어! 그리고 정리를 시작했느냐? 아니다. 중요한건 뭐다? 마인드 셋팅이다!


  일단 넷플릭스를 켜고 곤도 마리에의 정리 쇼, <곤도 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를 틀었다. 사실 몇 년 전 처음 곤도 마리에 열풍이 불었을 때는 좀 시큰둥했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니 하나 마나 한 말로 또 돈을 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넷플릭스 쇼가 유행할 때도 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그런 꼬인 마음은 다 버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쇼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이 쇼는 여러개의 에피소드가 있고, 각각의 에피소드 마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나온다. 아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부부, 자식들이 떠나고 거대한 집과 짐만 남은 노부부, 대가족, 사별한 여자, 게이 커플 등이 등장해 서로의 관계와 각자의 짐을 소개하고, 그 짐들을 정리해야 할 이유와 정리과정, 그리고 정리한 후 바뀐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의 형태도 다르고 사연도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하나, 정말 다들 짐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이다. 일단 미국 집의 사이즈란 것이 우리나라의 집 사이즈와는 너무 다르고, 그중에서도 아파트는 차라리 낫지 하우스에 사는

사람들의 차고와 지하실의 짐들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티비를 보다가 내 주변을 둘러보니 잠깐… 저

사람들에 비하면 이정도는 거의 미니멀리즘인데? 아니지 정신을 차려야지 하고 다시 쇼에 집중했다.


  역시 곤도 마리에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쇼는 내가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제목에 가지고 있던 의구심을 아주 친절하게 해결해 준다.

  한 에피소드에 나오는 커플 중 한 명은 계속 이 정리 자체에 대해 회의감이 있다. 옷을 정리하면서도 대체 “스파클링 조이”가 뭐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 (한국어로 ‘설렘’이라고 번역된 것을 이 쇼에서는 영어로 'Sparkling Joy’라고 번역한다) 다음날 곤도 마리에 상이 등장한다. 정리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던 이 남자는 작가다. 그의 책들을 쭉 쌓아놓고 곤도 마리에가 묻는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죠?” 그 남자는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읽었고 자기를 작가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앵무새 죽이기”를 꼽는다. 그리고 그 책을 물끄러미 본다. 그때 곤도 마리에가 얘기한다. “지금 느끼는 그 감정을 저는 Sparkling Joy라고 표현해요. ” 계속 투덜거리던 남

자는 그제서야 그 감정이 희미하게 어떤건지 알 것 같다며, 정리에 속도를 붙인다. 포인트는 곤도 마리에가 말하는 것이 설렘이든 스파클링 조이든, 표현의 방법은 다르지만 어쨌든 물건에 느껴지는 뭔가의 감정이 있다는 거였다. 이쯤 보니 나도 용기와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 나도 한 번 느껴보자. 스파클링 조이가 뭔지!


  곤도 마리에는 정리왕답게 자기만의 철칙이 몇 개 있다. 그중 옷정리에 대해서 지켜야 할 철칙은 모든

옷을 싹 다 한 공간에 꺼내 놓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랍장과 옷장 몇 칸에 나뉘어 있는 옷을

그래도 가끔 야금야금 정리해 왔었는데, 이참에 독한 마음을 먹고 싹 다 꺼냈다. 남들 대비 옷이 많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꺼내서 쌓아보니 좁은 집이 꽉 찰 정도였다. 360도로 둘러싼 옷 가운데 앉아서 정리를 시작했다. 일단 작년에 즐겨 입었던 옷은 가지고 있기로 했다. 딱 봤을 때 기억이 안 나는 옷은 다 버리기로 했다. 내가 이걸 언제 샀더라, 하는 옷이 정말, 정말 많았다. 과거의 무분별한 나여… 왜 그랬니… 그러고 났더니 옷더미의 절반 정도는 정리가 됐다. 이까지는 쉬웠다.


  이제 늘 실패했던 지점,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에 있는 옷들을 노려봤다. 1. 아주 좋아하고 즐겨 입었지만 약간 낡고 유행이 지난 옷 / 2. 뭔가 안 입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래도 비싸게 주고 사서 언젠가는 입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옷 / 3. 특별한 추억이 있는 옷 이렇게 대충 세 카테고리로 나뉘었다. 이제까지는 이 회색지대에 있는 옷을 정리를 못해 계속 안고 있었는데, 곤도 마리에 쇼를 네 개 정도 시청했더니 갑자기 마음이 명료해졌다.


  1번 카테고리의 옷을 보면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즐겨 입었던 옷들, 내 한때를 같이 해줘서 고맙다는 마음과, 이제는 보내줘야 할 때라는 마음이 진심으로 들었다. 하나하나 펼쳐보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안녕. 그리고 2번, 이 옷을 입게 될 언젠가가 지금이 아니라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안녕. 그리고 3번. 면접을 보러 다니며 입었던 옷, 첫 데이트를 할 때 입었던 옷, 친했던 친구가 선물해 준 옷, 이런저런 추억들이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그 옷들을 하나하나 펼쳐 보는데 드디어 그놈의 스파클링 조이랄까 설렘이랄까 약간 따뜻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딱히 이성과는 상관없이 그런게 느껴지는 극소수의 옷만 살아남았고, 나머지 추억에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또 안녕.


  세어보진 않았지만 5, 60벌 정도의 옷을 버린 것 같다. 드디어 옷장 문을 여는 게 무섭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벼워진 건 서랍장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옷 조금 버린 거로 이렇게 마음이 가벼워지다니! 단순히 물리적인 부피가 줄어 좋은 것도 있지만, 옷들을 정리하면서 그 옷들에 묻은 시간도 같이 털어낸 느낌이었다.


  이 쇼에서도 정리 전과 정리 후, 가장 달라진 것은 집도 집이지만 사람들의 표정이다. 물건에 두었던 마음의 무게를 덜었는지, 한껏 가뿐한 표정이다.

  옷 정리를 마친 지 일주일째, 버리면 아까울 줄 알았던 것들이 이제 뭐였는지 생각도 안 난다. 내가 이제껏 몇 번 이사를 다니며 이고 지고 살았던 것은 그냥 옷의 형상을 한 미련 덩어리였던 것이다.

  

  미련을 털어내고 가벼워진다. 비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작이 보인다. 아직 책장도 싱크대도 잡동사니도 정리할 것들이 잔뜩 남았지만, 두렵지 않다. 나에겐 아직 안 본 곤도 마리에 에피소드가 많이 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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