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는 무려 ‘냉장고’였는데요... 쓰다 보니 되어버린 회상파티입니다
십년도 더 전의 일이다. 졸업반을 앞두고 있던 나는 아주 모든 것에 자신이 없었다. 전공도 딱히 적성에 안 맞는 것 같고 졸업하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저 붕 뜬 기분이었다. 그래서 일 년 정도 선택을 유예하기로 했고, 당시 친했던 선배가 추천한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를 가보기로 했다. 뭔 자신감인지 모르겠는데 모아두었던 알바비로 왕복 비행기표를 사고 딱 한 달 정도의 집세를 들고… 그냥 갔다.
#1
일단 급하니까 한인 카페에서 글을 보고 케밥집 설거지 알바를 구했다. 그리고는? 일주일 만에 짤렸다. 설거지가 너무 느리다나 뭐라나! 하지만 손이 느린 건 사실이었고 중간중간 감자튀김을 엄청 주워 먹은 걸 생각하면 그래도 일주일치 급여를 받은 게 다행이었다. 가기 전에는 무슨 일이든 구할 수 있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와보니 영어도 못하는 외국인이 일자리를 구하기가 그리 만만하지가 않았다. 들고 온 돈은 다 떨어져 가고, 큰소리치고 온 게 있는데 이거 이주일만에 다시 돌아가야 하나 울적하게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웬 남자가 말을 걸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 개수작이고 아마 내가 조금만 더 나이가 들었어도 대꾸도 안 했을 테지만 만 스무 살의 나는 너무나 순진했다. 영어로 더듬더듬 대답을 하다 보니 오호 이 사람 한국친구들이랑 같이 사는데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초대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회상하며 적다 보니 나쁜 놈이 아니길 천만다행이다) 마음이 아주 활짝 열려있던 나는 엉겁결에 알겠다고 했고 어영부영 며칠 뒤 진짜로 갔다. 그는 두 명의 한국인 플랫메이트들과 살고 있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나를 꼬시려고 했던 게 맞았다. 하지만 또 양심은 있어서, 내가 스무 살인걸 알고 너무 어려서 괴로워하며 포기를 했다는데 (나중에 모두와 친해진 후 전해 들은 이야기임) 뭐 나는 진짜 해맑게 앞뒤사정도 모르고 ‘길에서 만난 친절한 사람~’ ‘한국인들한테 일자리 있나 물어봐야지~’ 하고 간 거였지… 결국 정말로 거기서 소개를 받아 일자리를 구하게 됐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꼬리를 꼬리를 물고 좋은 인연들을 만나게 되었다.
#2
알바자리를 구해 조금 여유가 생긴 나는 임시로 지내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집을 구했다. 처음 구한 집은 다섯 명이서 한 집을 셰어 하는 작은 아파트였다. 밤에 나가 물을 마시려고 불을 켜면 바퀴벌레 숨는 소리가 들리는 아주 오래된 아파트였는데, 그곳엔 필리핀, 독일, 사모아섬,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온 내가 같이 살았다. 비슷한 또래 사람들이 사니 딱히 요리도 하지 않고, 칸을 나눠 쓰는 작은 냉장고는 거의 비워져 있거나 우유나 맥주 정도만 굴러다녔다. 그러다 중국인 친구가 이사를 나가고 일본인 친구가 이사를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당시 파이나 라면 같은 걸로 대충 끼니만 때우고 살고 있었는데, 거실에 앉아서 티비를 보는 내게 일본인 친구가 말을 걸었다. “저녁 먹었니? 같이 먹을까?” 역시 염치 이런 거 몰랐던 내가 알겠다고 하자, 그 친구는 그 삭막하던 부엌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조리도구들을 꺼내서 감자와 가지를 썰고, 쌀을 씻어서 냄비밥을 하고, 고체카레를 녹이는 그 과정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려하게 이어졌고, 구경하는 사이 따뜻한 카레가 완성되었다. 그 친구의 이름도 얼굴도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왠지 또각또각 야채를 써는 소리와 따뜻한 카레를 한 입 먹었을 때의 기분만큼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서툰 영어로 “와 너 요리 잘하는구나 제대로 된 밥을 여기서 처음 먹어봐”라고 했을 때 그가 나에게 “어려운 게 아니야. 혼자서도 잘 챙겨 먹어야 돼”라고 했던 것도.
#3
알바자리는 내가 살던 오클랜드 시티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외곽에 있었다. 돌아오는 저녁버스에는 늘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느 날 늘 앉는 뒤쪽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술에 취한 것 같은 남자 한 명이 비틀거리며 버스를 타더니 내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뭐라 뭐라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술 취한 사람의 영어를 다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늬앙스가 아주 나쁜 것인 정도는 알아들었고, 몸이 바짝 얼어버렸다. 그때 버스 앞쪽에 앉아있던 어떤 중년 여자분이 아저씨에게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뭐라고 말하더니, 날 보며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며 여기로 오라는 시늉을 했다. 주춤주춤 다가가 앉았을 때, “이제 괜찮아 베이비”하며 아주 크고 따뜻하게 씩 웃어줬다. 살짝 벌어진 앞니와 베이비 라고 말할 때의 다정한 울림은, 아주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한 번씩 떠오른다.
#4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은 같은 백팩커에서 익스체인지 워커(일을하고 급여 대신 숙소를 제공받는다)로 일했던 에미, 토모, 카를로스다. 우리는 때로는 삼총사 때로는 사총사가 되어 오클랜드 시티 곳곳을 누볐다. 부스스한 얼굴로 함께 양치를 하고, 싸구려 팩와인을 나눠마시고, 예약이 없는 방에 몰래 들어가 작은 노트북으로 서로 추천하는 영화를 봤다. 우리는 모두 능통하지 않은 외국어로 이야기하며 답답할 때마다 서로의 언어를 섞어 썼지만, 신기하게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완전히 알 수 있었다.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날, 페어웰 파티에서 받았던 모두의 사진으로 만든 컵은 그 뒤로 수많은 이사를 거치면서도 서랍 속에 남아있다. 가끔, 조금 색이 바랜 젊고 어린 우리의 모습과 그때의 마음을 꺼내본다.
#5
그리고 언니들이 있다.
한국말과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는 줄리언니나 연언니네 집으로 갔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쯤으로 연언니를 처음 알게 된 것 같은데, 정작 누구의 친구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연언니는 손이 빨라 여러 요리를 척척 해내는 사람이었다. 언제 가든 삼십 분만 기다리면 뜨끈한 밥에 제육볶음을 차려줬다. 나는 염치도 없이 밥을 두 그릇씩 먹어내고도 다음날 빈손으로 또 갔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연언니는 아예 뉴질랜드로 이주해 풀타임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도, 내가 갈 때마다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요리를 해줬다.
연언니의 옆옆집에는 줄리언니가 살았다. 정확한 나이는 몰랐지만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 나이가 꽤 많은 편이었는데, 한국에서 번아웃이 와서 뉴질랜드로 왔다고 했다. 언니는 화통하고 호불이 강한 성격이었는데, 나를 유독 이뻐해줘서 언니의 가족들이 뉴질랜드에 놀러 왔을 때 왠지 어리둥절 그 가족여행을 함께 가기도 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지자 졸업 후 진로나 그런 거에 대해 슬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그때 줄리언니가 해준 말이 있다. (그건 내 주문이므로 여기엔 적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힘들거나 자신감이 없어질 때면 언니가 해준 말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혹시나 다시 인연이 닿아 감사인사를 전할 기회가 생긴다면, 긴 시간 동안 언니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계속 살아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꼭 말하고 싶다.
인류애가 바닥난 느낌이 들 때마다 나는 내가 뉴질랜드에서 보냈던 일 년을 생각한다. 아주 많은 타인을 만났고, 조건 없는 친절을 받았다. 운도 무척 좋았던 것 같고, 그때는 나도 마음이 아주 많이 열려있어 오히려 지금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스스로도 참 까탈스럽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람도 많이 가리고, 경계심도 높다. 얘는 이래서 싫고, 이건 이래서 안 맞고, 아마 지금 같은 상황에 처했으면 길에서 말 거는 놈에겐 대꾸도 안 했을 거고 남의 조건 없는 친절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거부했을 것 같다. 그때 만난 사람들도 지금 만나면 아마 친구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이미 성격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다시 열리긴 힘들 것 같지만, 확실히 마음이 열려있을 때 더 많은 기회가 오는 건 맞는 것 같다.
그때 만나서 많은 도움을 받았던 언니들을 생각해 보면 다들 각자의 힘든 삶을 떠안고 있었던 것 같다. 그와중 어린 여자애한테 줄 조건 없는 애정은 어디서 나왔을까. 받은 만큼 주고 준만큼 받는 것이 편해진 지금이지만, 가끔 그냥 더 주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큰 마음을 주려고 한다. 그들에게 갚지 못할 마음을 받은 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그 정도의 마음은 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많은 걸 가르쳐준 그 따뜻한 사람들이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다 행복하게 살고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