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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스키 Mar 16. 2024

서울, 시티오브소울

두무개다리를 지나갈 때 마다 두근대는 마음을 아시나요


  ‘야 니 이 노래 들어봤나, 완전 우리 노래다’ 몇 해 전 어느 날, 친언니에게 카톡과 함께 링크가 하나 왔다. 정밀아의 “서울역에서 출발”이라는 노래였다. (참고 : https://youtu.be/iElO7oUUtcU​ )

공연을 마치고 늦게 돌아온 다음 날, 멀리서 사는 엄마의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특별할 것 없는 화자의 삶을 담담하게 읊조리고 있다. 하지만 늘 노래 중간쯤, 친구 이름이 나오는 부분쯤에서 맥락 없이 나도 모르게 울컥하게 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말처럼, 지방 출신 서울 거주인들이 “우리 노래”라고 칭하게 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정서가 이 노래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이 노래는 나중에 한국대중음악상 3관왕에 빛나게 되는데, 아마도 심사위원 중에도 지방 출신 서울인이 많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부터 서울에 꼭 와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직장을 구하다 보니 어찌어찌 서울에 오게 되었다. 입사한 회사의 면접은 지방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1박 2일에 거쳐 진행되는 심층 면접이었다. 돈 없는 학생이었던 내가 어디 숙박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중학교 친구에게 연락해 그의 원룸에 하루 묵게 되었다. 두 사람이 누우면 빈 곳 없이 꽉 차는 그 집에 누워 지하철 노선도를 펴보며 가야 할 곳과 갈아탈 곳을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십 년이 훨씬 넘도록 그 지하철역을 매일 지나치게 될 줄은 모르고.


  해가 바뀌고 나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교 친구 중에서 취업을 일찍 한 편인 나는 서울에 친구가 없었다. 서울 생활은 회사생활이었다. 호젓한 동네의 캠퍼스와 기숙사에서 대학 생활을 보낸 나는 일단, 쫄았다. 회사 동기 스무 명 중에 나 빼고 열아홉 명 모두 서울 사람이거나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었다. 배정받은 팀 사람들도 어찌 된 노릇인지 나 빼고 모두가 서울 사람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서울 사람이 많다니? 아니 서울이 고향이라고? 네? 할머니도 서울에 계신다구요? 그러면 시골 할머니집이 없어요?? 어떻게 그렇지...


  회사 사람들은 내가 입만 열면 호들갑을 떨며 경상도 출신이냐고 자기네 친척 누구도 부산에 산다며 반가워했고 (지금 생각하면 그냥 신입사원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착한 사람들이었다) 이미 약간 꼬여있던 나는 “부산이 지리적으로 서울보다 큰데요.”라며 사회성 떨어지는 리액션을 보이곤 했다. 나 빼고 모든 사람들이 세련되어 보였다. 거꾸로 말하면 나만 촌스러운 것 같았다. 말이라도 어떻게 고쳐볼까 했지만, 이미 이십 대 중반까지 못 고친 사투리가 갑자기 고쳐질 리도 없었고, 회사에서 발표를 해야 하는 날이면 계속 어정쩡하게 어미를 흐리며 나도 같이 흐릿하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첫 팀의 팀장님은 내 눈에는 너무나도 굉장한 서울 사람, 강남 토박이였다. 영 적응을 못 하는 내가 조금 신경 쓰였는지 본격 서울 체험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내게 제일 맛있는 식당은 아웃백이었었는데,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세계음식과 좋은 식당을 데려가 줬다. 처음으로 똠얌꿍을 먹고 숨길 수 없는 감탄사가 나올 때 흐뭇하게 보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맛있는 음식, 좋은 전시, 심지어 남산 케이블카까지 회사에서 함께 했고, 나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서울의 좋은 것들을 쭉쭉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서울은… 진짜 짱이었다. 좋아하던 가수들의 내한 공연도, 지방에선 개봉관 자체가 없던 독립영화도, 계절마다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도, 지하철 타고 삼십 분만 가면 다 볼 수 있었다. 더 이상 학교에 내려갈 막차를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이곳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었고, 새로운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고 여기저기 쏘다녔다. 내가 특히 좋아한 곳은 남산 소월길과 낙산공원이었다. 그곳에서 불빛으로 빼곡한 서울을 내려다보면, 마치 내가 서울이고 서울이 나인 듯 몽글몽글한 마음이 차올랐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물론 좋은 감정만 있는 건 아니었다. 서울에 사는 건 돈이 많이 들었다. 이 거대한 자본주의 도시의 모든 건 아주 잘게 층층이 나누어져 있어 나도 모르는 줄에 세워져 있는 느낌이었다. 부동산 버블이 시작되었고 ‘부모가 얼마 보태줘서 3억에 산 아파트가 10억이 됐대!’라는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괜스레 화가 났다. 아마 서울이 고향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럴 자금도 안목도 생각도 없었겠지만,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부러운 마음, 그리고 그 부러움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툴툴거리다가 막상 집으로 돌아오면, 작은 내 집이, 내가 오롯이 쌓아 올린 이 삶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어떤 자랑스러움마저 느껴졌던 것이다.


  지방 출신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공통적으로 서울에 대한 애증을 느끼는 듯하다. 이곳을 사랑하든 싫어하든, 서울이라는 주제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곡을 쓰고 글을 쓰는 사람은 아마도 서울 사람들은 아닐 거다. 친구들끼리 가끔 ‘서울 사람들은 자기들이 서울 사람으로 불린다는 걸 알까?’ 하고 킬킬거릴 때도 있으니까. 우리는 이제 각자의 고향에도 속해있지 않지만, 서울에도 완벽히 속해있지 않다.


  그런 동질감을 느끼며 정밀아의 노래를 나눠 듣는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우리의 삶은 ‘한 백번은 변한 것’ 같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랬구나’ 한다. 퇴근길 집으로 갈 때, 빽빽한 집과 차의 불빛을 보며 내가 이곳에서 일구어낸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갖게 된 것들과 잃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서울은, 어떤 날엔 내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고 어떤 날은 또 내 영혼을 배불리며 그 모양을 다듬는다. 이곳은 나에게 시티 오브 소울.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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