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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스키 Oct 17. 2023

시선의 무게

넷플릭스 오리지널 <러브 이즈 블라인드>를 보고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데이트 쇼를 정말, 정말 많이 본다. 그렇다고 막 장면 장면 가슴을 부여잡고 몰입해서 보진 않고, 퇴근하고 머리 식힐 겸 넷플릭스를 헤매다 보면 어김없이 또 데이트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있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데이트 프로그램들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거의 다 본 것 같은데, 다소 심드렁하게 틀어 놓는 와중 늘 매우 집중해서 보며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연애 실험 : 블라인드 러브>. 지금 미국 편은 시즌5가 방영되고 있고, 브라질 편과 일본 편도 있다.


  포맷은 어렵지 않다. 일단 각각 열몇 명씩의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벌집같이 생긴 “포드”라는 방이 있고, 여기 각각 한 명씩 들어가 서로 분리된 채로 목소리로만 1:1 대화를 한다. 처음엔 짧게 짧게 돌아가면서 하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추려지면 자연스레 그들과 집중적으로 대화를 하게 된다. 며칠 동안 촬영하고 한 번에 몇 시간 동안 포드 데이트를 하는지는 정확히 공개되진 않았지만, 한 번에 열 시간 동안 대화를 했다는 대사로 미루어보아 거의 일주일에 걸쳐 꽤 집중적으로 대화를 하는 것 같다.


  보는 사람이 놀랍게도 이 대화 단계에서부터 매우 감정이 깊어지며, 질투와 견제, 이별과 싸움 등 연애 단계에서 겪는 모든 일이 일어난다. 오로지 대화로만! 프로그램 참여자 모두가 입을 모아 이건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이렇게 사랑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쯤 되면 정말로 대화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게 가능한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느끼면, 어느 한쪽이 프러포즈를 한다. 프러포즈를 하게 되면 처음으로 실물로 만날 수 있게 된다. 불투명한 문이 서로 열리고 목소리만 듣던 서로가 처음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자 여기까지가 이 쇼의 전반부이다.


  이어 커플들을 휴양지의 좋은 리조트 등으로 ‘허니문’(프로그램 안에서 허니문이라고 일컫는다)을 보내 주며 중반부가 시작된다. 완전히 현실과 격리된 곳에서 단둘이서 지내게 되는 것이다. 중간에 프러포즈에 성공한 커플들을 다 모아놓고 파티도 여는데, 여기서 포드 안에서 썸을 타던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며 지금 파트너는 열을 받고... 보통 첫 번째 위기 상황이 찾아온다.


  후반부 부터는 본인들의 삶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동거를 하게 된다. 직장을 다니고 가족과 친구를 만나고... 유리된 데이트에 진짜 삶이 찾아들면서 이제 거의 모든 커플들이 최고조의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 쇼의 피날레는 결혼식장. 단상에 서서 눈물의 최종 선택, 예스 오어 노우를 하며 쇼가 끝난다. 보통 한 시즌에 최종 두 커플 정도는 나오는데, 트리비아를 찾아본 결과 일단 그 난리 부르스를 치면서 결혼을 하게 되면 잘 살긴 하는 것 같다.


  이 쇼가 흥미로운 점은 일단 제목에서 드러나다시피, 호스트와 참가자 모두 이 과정을 “실험”이라고 칭하 는 것이다. 이 쇼가 실험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연애에 필수적인 두 가지 시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초반부에는 서로에 대한 시선이 부재하고, 중반부에는 남들이 그들을 보는 시선이 부재한다. 이 쇼에서 어떤 식으로든 감정이 폭발하는 때는 부재하던 시선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쇼 전체에서 내가 가장 재밌어하는 부분은 전반부와 중반부의 사이, 처음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옛날 ‘TV는 사랑을 싣고’의 세트장마냥 다소 촌스러운 문이 열리고, 이제껏 대화로만 사랑을 쌓아나 가던 사람들은 처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정말 엄청난 텐션이다.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커플은 만나자마자 서로 뛰어가 키스를 하고, 어떤 사람은 어색하게 쭈뼛쭈뼛 다가간다. 이 쇼의 모든 시즌을 다 보다 보니, 이제는 저 첫 만남의 순간으로 최종 결과도 꽤 높은 확률로 점칠 수 있게 되었다. 만나자마자 감격에 겨워 서로에게 격한 반응을 보일수록 최종 커플로 남을 확률이 높다. 아무리 포드 안에서 절절한 사랑을 했어도 서로 만나는 순간 생각보다 얌전하다면 글쎄, 남은 시간 동안 서로에게 육체적으로 끌리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반복하다가 잘 안될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브라질 편에서 어떤 남자는 여자를 처음 보자마자 그 쇼를 포기한 적도 있다.) 이 쇼의 처음 목적은 외모와 조건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대화만으로 평생의 짝을 찾는 것이 가능한지를 다루는 것이었는데, 글쎄 시즌이 반복될수록 역시 외모가 제일 중요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만 드는 것이다.


  잘 흘러가던 이야기가 첫 번째 시선이 등장하면서 꼬이기 시작하고, 중후반부에서 두 번째 시선이 등장하며 굉장한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래 나라도 가족이나 친구가 두 주일 동안 사라졌다가 약혼자랍시고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결혼한다고 하면 일단 말리고 보지 않겠어? 굉장히 쿨한 태도로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는 부모도 있지만, 많은 부모나 친구들이 상대편의 존재 혹은 그들 사이의 감정에 평가하는 시선을 보내면서 그때까지 굳건해 보이던 커플들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거기다 그제껏 제쳐두었던 현실적인 문제, 직업이나 재정 상황 등이 끼어든다. 이쯤 되면 카메라는 각 커플의 싸움들만 보여주기 바빠진다.


  만남에서부터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4주로 압축한 이 실험 후, 쇼의 엔딩은 결혼식장에서 이루어진다. 단상 위에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복잡했던 여정을 뒤로하고 이제 남은 건 서로에게 보내는 시선 뿐이다. 서로를 향한 시선이 다른 사람이 그 둘을 보는 시선보다 강력할 때, 나의 마음을 향한 시선이 다른 것들을 보는 시선보다 솔직할 때 비로소 그들은 사랑을 확신한다. 숨 막히는 침묵을 뒤로하고 예스를 말할 때, 그 과정을 모두 함께한 시청자라면 진심으로 그들의 행복을 바라게 된다. 누가 감히 데이트 프로그램을 비웃는가! 저 정도의 진심으로 산 적이 있나? 제발 행복해줘!

 

  어떤 곳을 바라볼 때 “시선을 둔다”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볼 시에 줄 선, 눈이 가는 길이라는 뜻의 단어 지만, “둔다”라는 동사에는 무게가 느껴진다. 시선에는 무게가 있다. 그 무게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피날레를 보며, 제발 이 대단한 쇼의 한국 편도 제작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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