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로 16기 종방을 기념하며
(*아래 편지는 프로그램의 캐릭터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안녕하세요 영숙 님,
먼저 당신과 당신의 16기 동기들에게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16기가 방영되는 석 달 정도의 시간 동안, 조금 어색한 자리에서도 “혹시 나솔…”이라는 마법의 단어를 꺼내기만 하면 처음 보는 사람과도 몇 분 정도는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말재주도 없는 주제에 대화의 공백을 못 견디는 저에게는 석 달간의 축복이었죠. 정말 안 보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이번 기수가 이렇게 인기를 넘어서 신드롬으로 자리 잡게 된 시작은 바로 영숙, 당신이었죠.
솔로 나라 셋째 날이었나요, 당신이 광수와 데이트를 가는 차 안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었죠. 당신의 과거에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는 편집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광수가 현재 자기의 고민과 심경을 토로하자 당신은 광수에게 그 정도 고민은 “포시랍다” 라고 하죠. 그 단어는 경상도 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 안의 미묘한 뉘앙스까지 한 문장으로 설명하긴 어려워요. 대충 “내 상황에 비해 당신의 상황은 훨씬 나으며 그건 배부른 걱정이다”라는 뜻을 담아 핀잔줄 때 사용한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말의 재밌는 점은 “덜 가진 나”를 “더 가진 너”보다 더 우위에 놓고 쓴다는 점이에요. 이 말로 16기의 모든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점은 꽤 흥미롭죠. 당신은 솔로 나라 내내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너”를 의식하고 끌어내리며 “덜 가진 나”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도구로 쓰려고 하니까요.
그 말부터 광수와의 지독한 오해는 시작되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보기엔 그저 대화의 요령이 좀 없는듯한 광수가 영숙 님의 말을 받아 “산전수전” “파란만장” 같은 단어를 이야기하는 순간, 당신은 폭발해 버리고 말죠. 본방송으로 보고 있던 저는 거의 맞은편 광수만큼 당황했습니다. 저 단어는 1초 전 당신이 스스로를 묘사하며 쓴 단어가 아닌가요? 요령 없는 광수 씨는 그저 말을 받아 공감을 해주려고 했을 뿐인데요. 광수도 이후에 여러 행동들로 화제가 된 인물이지만, 여기서는 처절할 정도로 답답하고 안쓰럽습니다.
기분이 상해 데이트를 중단하고 돌아온 당신에게, 당신의 원픽 상철이 등장하죠.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고” “설거지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한다는” 상철이 당신에게 건네는 위로는 “광수가 오빤데 사과해야지” 입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크게 치고야 말았지만, 머리는 다소 혼란스러웠습니다. 평소 같으면 극도로 싫어했을 발언인데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그맣게 상철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들린 겁니다. 제 안에도 가부장이 있던 걸까요? 저도 어쩔 수 없는 유교랜드 사람인가요? 아아, 당신은 정말 폭풍과 혼란을 몰고 다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도 폭풍이 일었어요.
이번 나는 솔로의 여러 ‘빌런’들이 화제가 되면서, 시청자들 사이에는 그중 실제로 가장 견딜 수 없는 극 중 캐릭터는 누구인가 토론하는 일이 잦아졌어요. 어떤 사람은 당신을, 어떤 사람은 상철이나 영자, 광수를 뽑습니다. 저는 광수라고 답해요. 그리고 그걸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종의 자기혐오 같은 것도 섞여 있습니다. 저는 귀가 꽤 얇거든요. 남의 말에 잘 휘둘리는 편이기도 합니다. 평생에 걸쳐 주의하고 조심해 왔던 내 안의 약점이 나는 솔로 안 캐릭터를 통해 최악으로 재현되는 걸 본 거예요. 정말 견디기가 힘들죠.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이번 기수에 나오는 빌런의 캐릭터는 가까운 사람이든, 자기 자신이든, 일종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 같아요.
이렇게 다양한 캐릭터가 화제가 되었던 기수가 또 있을까요?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은 모두가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이기 때문에, 이때까지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단점이었던 ‘납작하게만 묘사되었던 빌런’이 드디어 입체성을 가지게 되었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쇼에서 이렇게 이들의 개성을 이끌어낸 것은 누구일까요? 바로 영숙, 당신입니다.
당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것을 세상의 진리인 양 말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귀가 얇은 광수가 극단적으로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게 되죠. 새벽에 울면서 참회의 기도를 하러 가는 명장면이 누구 때문에 탄생했습니까? 영숙 당신 덕분입니다. 지긋지긋하게 집요한 가부장맨 상철은 또 어떻고요? 당신에게 집착하며 그 캐릭터는 완성이 됐죠. 지기 싫어하는 영철에게 당신은 좋은 자극제가 됩니다. 당신보다 더 거만한 말투로 소위 ‘뇌피셜’을 읊으며 여기저기 충고를 해대는 바람에 또 갈등을 빚어내죠.
당신이 가는 곳엔 사건이 생기고, 사람들의 못난 면이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당신이 조금 두렵습니다. 당신을 보다 보면 제 안의 못난 마음이 너무 의식이 되거든요.
다른 빌런들의 등장으로 당신에 대한 존재감이 조금 희미해졌을 무렵, 당신은 극 내내 아무 관심 없던 영호를 지푸라기처럼 세워놓고 달밤의 마당에서 혼신의 춤사위를 나 홀로 선보입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꿈에서 깨듯, 나는 솔로 과몰입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당신은 짝을 찾기 위해 이 쇼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 쇼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죠. 광수와 상철, 옥순과 영자는 모두 그저 도구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이번 기수가 소위 대박을 터트리고 여기저기서 한 피디의 인터뷰를 보면 이게 진정성 있게 방송을 만들어 온 결과라고 다소 자부심에 가득 차서 이야기합니다. 어이가 없죠. 저는 당신이 다른 등장인물을 비난하는 것 대신 피디를 걸고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캐릭터에 생동감을 부여한 게 누구입니까? 이 모든 게 당신의 덕인데 그렇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자화자찬을 하다니요.
혹자는 마지막 라이브 방송에서 당신이 수상소감 읊듯 소감을 말한 것을 비난하지만, 전 당신이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석 달이란 시간 동안 전 국민에게 도파민을 선사해 주는 건 영숙, 당신이 아니면 힘든 일이니까요. 저는 퀸영숙이란 별명이 당신에게 너무나도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솔로 나라 밖 현실로 돌아간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도 주인공이 되어 영원한 퀸으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2023년 10월, 당신과 석 달을 울고 웃은 한 시청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