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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스키 Oct 27. 2023

언제까지 어깨춤만 추는 삶에 대해

<드링킹>,  <술꾼도시여자들>에서 빌려온 취기

  나는 술에 대해 쓸 자격이 없다.


  음복주를 한 잔 마시고 실려 갈 뻔했다는 엄마를 닮아, 나에겐  알콜분해효소가 없다. 취기를 수치화하긴 어렵지만, 대충 술 잘 마신다는 사람들이 필름이 끊기는 정도를 10, 그들이 즐겁게 만취했을 때를 8 정도라고 한다면 나는 3 정도에서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가 5 정도에서 토를 해버린다. 그러고 나면 다시 0으로 돌아가고, 또 3까지 가서 기분이 좀 괜찮아져 홀짝거리다 보면 5에서 그만 화장실로 뛰어가 버리고… 술자리의 평균 취기가 너무 올라 다 같이 눈 쌓인 화단에 드러누워 버린 상황에서도, 나 혼자 엉거주춤하게 옆 벤치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친구들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게 된다. 같은 돈 내고 같은 시간 동안 놀았는데 지금 눈밭에 파묻혀서 파닥거리고 있는 쟤네가 즐거울까, 제정신으로 집에 들어갈 길을 걱정하고 있는 내가 즐거울까? 술을 잘 못 마신다는 것은 유희의 측면에서 상당히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인 것이다!



  아무래도 몸이 알코올을 굉장한 유독물질이라고 여기는지 늘 정신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 속을 싹 비워버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몸을 못 가눈다거나 필름이 끊기거나 만취의 즐거움을 느낀 적이 없다. 취기가 올라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거나 쓸데없는 말을 한다든가의 일은 있지만, 거기서 더 마시게 되면 또 토하러 뛰어가게 될까 봐 신경은 오히려 곤두서게 된다. 그러니 어딜 가든 맥주 한 잔, 조금 더 기분 좋아지고 싶으면 두 잔, 석 잔부터는 위험하다. 이걸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하룻밤에도 몇 번씩 토하고 마시고를 오기로 반복했지만, 그것도 튼튼할 때 이야기지 나이가 들면서 토의 괴로움을 알고 차차 그 정도로는 먹지 않게 되었다.



  내일이 없는 듯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몸을 못 가누고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술꾼들을 보면 불쾌감보다는 정말 순수한 호기심이 들었다. 저렇게 몸과 마음을 다 놓고 취한다는 것은 어떤 걸까? 남들이 어떻게 보든 말든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아 조금 부러워.



  술뿐만 아니라, 나에겐 음주-가-무 그 어떤 흥의 기운도 없다. 술에도 몸을 못 맡기는데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중독의 욕구도 없다. 신입생 때 선배가 줬던 담배 한 갑은 세 번 정도 도전해 보고 졸업할 때까지 서랍 속에 그대로 있었다. 그 어떤 행위나 물질에도 못 멈출 정도로 빠져든 적도 없고, 심지어 덕질 유전자도 없다. 요약하면, 나는 인생을 너무 제정신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제정신으로 계속 살다 보면, 가끔 제정신이 지겨울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뭘 하냐, 무알콜 맥주를 한 잔 마시며 술이 나오는 콘텐츠를 본다. 최근에 본 일본 드라마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퇴근 후 늘 근처 선술집에서 맥주와 국수를 먹었다. 맥주를 꽐꽐꽐 따르는 소리와 세상 가장 시원한 표정으로 한 모금 쭉 들이키는 얼굴을 보면 내가 다 개운해졌다. 아예 주인공들이 내내 취해있는 ‘술꾼도시여자들’이라는 드라마도 있다. 이건 등장인물들이 매일매일 너무 취해있어서 약간 경이로운 마음으로 보게 되었는데, 화려한 액션으로 회오리 샷을 만들 때마다 박수를 짝짝짝 치며 저 친구들 내일 출근은 가능한가… 나도 모르게 걱정하게 된다. 와인에 대한 건 또 어떤가. 와인과 인생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사이드웨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는 와인샵이 있으면 꼭 들어가 보게 되었다. 언젠가는 나도 피노누아와 멜롯을 차례대로 마시며 인생을 논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무리겠지…?



  콘텐츠 중에서는 이렇게 즐거운 취기만 있는 건 또 아니다. 캐롤라인 냅의 대표작 ‘드링킹’은 작가 자신의 알코올 중독에 대해서 지나칠 만큼 솔직하고 통렬하게 적어낸 책이다. 록산 게이의 ‘헝거’,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과 함께 내 마음속 최고의 자기 고백 에세이로 꼽고 있다. 세 책 모두 처음엔 신기함으로 삶을 들여다보다 중간쯤에는 남의 인생을 이렇게 소비해도 되나 하는 당혹스러움마저 느끼고, 마지막에는 그저 존경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끝내게 된다. 캐롤라인 냅은 이 책에서 중독의 인지와 부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자신을 너무나 지적으로, 거의 매력적일 정도로 그려낸다. 나는 아마 평생 가도 알 리 없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이렇게 글로 쉽게 소비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지만, ‘술’이라는 주제를 들었을 때 바로 이 책이 생각날 만큼, 여러 번 읽은 책이다.



  이렇게 술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콘텐츠가 계속 나오는 걸 보면, 그곳엔 내가 모르는 아주 깊고 넓은 세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인생은 길고, 사람은 어찌 될지 모르니 기적적으로 환갑쯤에 제대로 된 술꾼이 되어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앞으로도 당분간은 지금처럼 취기를 외주주며 지낼 것 같다.

  오늘은 유독 업무가 힘들었고, 제정신이 지겨운 저녁이다. 탄산수 한 캔과 함께 넷플릭스에서 알코올을 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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