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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스키 Nov 27. 2023

이 시시한 삶을, 최선을 다해 다시

일드 <브러쉬 업 라이프>를 보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죽었다. 하얀 무의 공간, 왼쪽 문을 열면 큰 개미핥기로 다시 태어난다. 오른쪽 문을 열면 0살부터 다시 삶을 살 수 있다.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여기저기서 잔잔하게 추천받아 찜 목록에 두고 시간만 보내던 일드, <브러쉬 업 라이프>를 드디어 광복절 연휴에 보게 되었다. 전체적인 컨셉은 이렇다. 서른세 살에 사고로 죽게 된 주인공 콘도 아사미는 지금까지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인생 2회차를 다시 살든지, 아니면 과테말라의 큰 개미핥기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새로 살게 되는 인생에서 덕을 쌓으면 다음 생애에는 다른 생물로 태어날 수 있다. 그게 인간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몇 번을 다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사미는 유독 30대에 죽을 확률이 확 높아지는 운명이고, 2회차, 3회차, 계속 다시 사는 인생을 택한다. 처음에는 덕을 쌓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나중에는…



  계속 반복되는 콘도 아사미의 인생은 크게 바뀌지 않는 듯 보인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츠키, 미호와 함께 삼총사가 되어 놀고, 중간중간 덕을 쌓기 위해 쓰레기를 줍고, 이미 1회차 인생의 기억이 있기에 적재적소에 나타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n회차 인생인 덕에 학업 성취도도 약간 좋아지지만 그뿐이다. 그녀 주변에는 언제나 든든한 두 명의 친구가 있고, 성인이 된 후에도 한 달에 두 번은 꼭 만나 밥을 먹는다. 인생의 회차가 반복되며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고향의 식당이냐 도쿄의 자취방이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녀의 인생은 회귀물치고 지나치게 잔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비슷비슷하다. 애써서 나름의 덕을 쌓아보지만 그녀가 새로 산 인생에서 쌓은 덕은 인도태평양의 고등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정도이다.


(아래부터 초강력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혹시 이 드라마를 보실 분은 건너뛰고 읽으세요)


  그리고 네 번째 삶, 그녀의 인생은 드디어 많이 바뀐다. 제대로 덕을 쌓기 위해 고성취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 몰두하느라 이번 회차의 인생에서는 처음으로 단짝 친구들과 친해지기를 포기한다. 그때 이때까지의 인생에서는 왠지 너무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아서 도저히 친해질 수 없었던 학교 최고의 모범생, 마리가 접근한다. 그녀의 말은 기절초풍, 사실 마리의 첫 번째 인생에서는 아사미, 나츠키, 미호, 그리고 마리까지 네 명이 단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인생에서 나츠키와 미호가 사고로 죽게 되고, 마리는 인생 2회차부터 우정을 포기하고 열심히 공부해 그 사고를 막기 위한 직업을 가지려고 한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n회차 인생을 공유하고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또 실패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사미의 인생 5회차, 오로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인생을 100년 넘게 살아온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환생을 거부하고 또다시 같은 삶을 살기를 선택한다. 인생 6회차째인 마리와 함께 단짝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인생 5회차가 되어 아사미는 드디어 깨닫는다. 각 회차의 삶은 다음 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생을 최대한으로 살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항상 같은 친구들과 같은 곳에서 밥을 먹고 같은 노래방을 가고, 뻔한 말장난을 하는 그 모든 시시해 보이는 순간이, 실은 100년이 넘은 그녀의 인생 중 가장 행복하고 지키고 싶은 순간이라는 것을. 짧은 문장으로 말할 때는 그저 당연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넘어가는 당연한 진리지만, 아사미의 긴 인생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그 사실을 백 년의 시간을 숨 가쁘게 함께 달려 처음 안듯,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게 된다.



(스포일러 해제!)


  간혹 인스타그램에라도 올리는 건 거의 주말의 삶이다. 평일엔 뭐, 그저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는 넷플릭스를 보고 자는 비슷비슷한 날들의 연속이다. 파티션 너머 같은 팀 동료들과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적당히 예의를 지키는 그런 사이다. 그런 우리가 매일 11시20분쯤 되면 늘 하는 루틴이 있다. 신중하게 미리 머리를 맞대고 구내식당의 메뉴판을 체크하고, 몇 개의 메뉴중 무엇을 먹을 건지 정한다. 어쩌고 기름 떡볶이 같은 특이한 메뉴가 있으면 하나씩 나눠 먹으면서 맛을 보고, 서로의 식판을 보며 아 나도 그걸 먹을걸, 어 이거 좀 드실래요 하면서 밥을 먹는다. 느릿느릿 걸어 커피를 사 올 때는 누군가가 자주 하는 농담을 한다. 늘상 하는 같은 이야기라 백 번도 더 들은 것 같지만 다들 어김없이 같은 부분에서 깔깔거리며 웃는다.


  광복절 연휴 내내 브러쉬업 라이프를 보고와 그다음 날 또 다 같이 메뉴에 대해 심각하지만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토론을 하는데, 갑자기 약간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이 생에서 내가 흘려보내는 이 평범한 시간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훅 다가왔다. 다 같이 먹는 구내식당의 점심이, 우리끼리만 공유하는 작은 농담이, 이 작고 시시한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은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을 큰 사건들로 기억한다. 전공을 바꾸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고, 애인을 헤어지고 만나고, 취미를 시작했다가 그만두고, 그렇게 타임라인을 따라 크게 그린 점들을 이어 만든 그래프를 그렸다. 이제는 그 큰 점 주변에 흩어져 있는 모래알 같은 점들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려고 한다. 미술 시간에 진한 색깔의 크레파스가 아닌 연한 파스텔을 처음 만져 보았을 때처럼, 작고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 점들 위를 조심스럽게 칠해본다. 흩어져 있는 평범한 시간위를 부드럽게 채우는 이 연한 색깔이, 몇 번의 인생을 다시 살아도 최선을 다해 지켜내야 할 시시하고 아름다운 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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