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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스키 Feb 17. 2024

낙법은 생각하지 않은 채로

** ”낙법“이라는 주제로, 당시 방영했던 웨이브 오리지널 리얼리티 프로그램 <좋아하면 울리는 짝짝짝>의 한 장면에 대해 쓴 글입니다.



  “널 좋아했으니까... 지금... 지금도 좋아해. ” 금요일 밤 열두 시. 내가 졸려서 헛걸 들었나? 이 대사가 차별금지법도 없는 나라의 연애 프로그램에서 여자가 여자에게 한 말이라니?


  앞의 상황은 이러하다. <좋아하면 울리는 짝짝짝>이라는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에서는 서로 어플로 하트를 보내며 마음을 전한다. 출연자 자스민과 백장미는 같은 남자 꽃사슴을 좋아하고, 둘 다 꽃사슴에게 하트를 보내는 중. 출연진 모두가 둘을 라이벌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커플 데이트 매칭을 하는 날, 혼자 남을 위기에 처한 백장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건 자스민. 자스민은 사실 처음부터 백장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남다른 우정이라 생각한 백장미는 자신의 하트(이 프로그램은 하트를 많이 모아야 승리하는 프로그램으로, 여기서는 하트가 일종의 재화이다)를 모두 소진해 최고급 데이트 코스를 산다.


  데이트를 나간 자스민은 어떻게든 백장미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도 말해보고 저렇게도 말해보고 하루 종일 다양한 방법으로 고백을 시도해 보지만 백장미는 해맑은 표정으로 모든 것을 아름다운 우정으로 만들어버리고... 어느새 밤이 되어버린 마지막 데이트 코스. 지친 표정의 자스민은 이제 돌려 말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마음을 위와 같이 솔직히 말한다. 여기까지가 저 고백까지의 상황. 물론 다음 화에 위 고백 장면은 뒤의 멘트를 생략하고 가공한 편집이었던 것이 밝혀져 시청자들의 대단한 원성을 사게 된다. 닫힌 대한민국답게 결국 둘은 아름다운 우정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저 장면에서 둘의 감정선은... 연애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서도 정말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을 표방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사서 어플 속 하트를 받아내야 승리하는 게임의 속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애초에 프로그램 컨셉부터 진지한 감정보다는 하트를 모으기 위한 가벼운 플러팅이 중요하게 설계된 것이다. 그 와중 카메라 밖 실제 상황이 어떻든 낮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이 고백씬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마음에 대한 당혹스러움, 그것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의 좌절과 피로함, 결국 될 대로 되라고 마음을 던지는 그 과정을 십분가량의 편집본으로 정확하게 압축해 재현한다. 어플로 하트를 보내는 것이 이 세계관의 룰이지만 이 고백의 순간에 어플은 끼어들 틈이 없고, 10화 내내 이어온 하트 게임은 무의미해진다. 이후 다소 시시하게 끝난 프로그램의 엔딩과 무관하게, 독보적인 조회수로 인기몰이를 하는 클립은 잔뜩 피로한 얼굴로 몸과 마음을 훅 던져 버리는 자스민의 모습이다.



  사람이 어딘가로 몸을 던질 때는 본능적으로 가장 충격을 덜 받는 방법으로 착지하게 된다. 어디에 떨

어질지,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질지에 따라 방법은 다르다. 유도처럼 체중을 안전하게 분산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고, 다이빙처럼 몸을 뾰족하게 만들어 수면에 부딪힐 때 충격을 줄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운동선수들은 이 기술을 낙법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한다.


  우리에게도 평생에 걸쳐 오랫동안 연마한 각자의 낙법이 있다. 몸과 마음을 던져야 할 때, 처음에는 그

충격을 떠안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어느새 충격을 받지 않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겁이 많은 나의 낙법은 아주 조심스럽다. 무게 중심을 단단히 위치하고, 한쪽 다리 정도 슬쩍 내려 떨어

질 바닥을 확인한 다음 조심히 내려온다. 몸을 완전히 던지지도, 아름답게 착지하지도 않는 그 모습이 충격에서 나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나만의 낙법을 충분히 익혔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마음이 찾아온다. 새로운 감정 앞에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온 어정쩡한 낙법은 아무 의미가 없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면, 떨어질 높이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다면 이제껏 연습해온 낙법이 다 무슨 소용인가. 마음이 계속 커지다 무게중심이 훅 꺾여버리는 순간이 오고, 그때는 그냥 어딜지 모르는 곳으로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곳이 콘크리트 바닥이라 산산조각이 날지, 깊은 물 속이라 영원히 가라앉을지는 떨어지기 전까지 모른다.


  

눈을 꼭 감고, 낙법은 생각하지 않은 채로 떨어진다. 몸과 마음의 모든 무게를 온전히 실어서.

  어디까지 떨어졌을까, 부드러운 손이 나를 받아낸다. 내 앞의 따뜻한 숨을 느끼며 눈을 뜬다. 처음 보는 세상에 착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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