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던 것> 이라는 주제로 적었던 글입니다
애살이라는 말을 아는가? 애살은 주로 부산이나 경남 지방에서 흔히 쓰는 사투리로, 단어의 뉘앙스를
한 문장으로 확실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요약하자면 ‘무언가를 막 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애살이 많다’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칭찬으로도 비난으로도 쓰일 수 있고, ‘애살이 없다’는 대개
의 경우 그냥 비난이다. ’니는 애살이 너무 없다!’라는 말은 엄마가 나에게 평생에 걸쳐 한 잔소리다.
엄마는 작은 산골 마을 출신이다. 성실함과 절약이 몸에 배어있고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실용적이지 않은 일은 다 사치로 여겼다. 이런 집에서는 취미는 당연히 사치이다.
운동? 동네에 뒷산이 있는데 거기나 가지 왜. 피서? 집 앞으로 사람들이 피서를 오는데 왜 굳이. 예술? 가서 공부나 해. 나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언니에게 물려받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도서관에 가서 빌리
는 책들뿐이었고, 엄마는 이마저 공부할 시간에 책이나 읽는다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엄마는 나에게 몸을 바지런하게 움직이며 동시에 끈기 있게 엉덩이를 붙여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애초에 모순적인 요구가 아닌가!) 나는 둘 다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매번 애살이 없다는 욕을 얻어먹었다.
하지만 이런 엄마의 실용성이 예외인 곳이 있었는데, 놀랍도록 다채롭고 양이 많았던 우리 집 밥상이다. 엄마는 가족을 먹이는 일을 사명처럼 여겼고, 늘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제철 반찬과 고기국을 차려냈다. 나는 정서적으로는 다소 매말랐지만 신체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무럭무럭 자랐고, 큰 허우대와 실용적인 마음을 가지고 다소 애살은 없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고 처음 돈을 벌게 된 지 일 년쯤 지나서, 회사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나를 돌아볼 여
유가 생겼다. 종종 가는 여행이나 공연이나 그런 것 말고, 제대로 된 사치를 부려보기로 했다. 매일에 여
분의 것을 추가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실용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주 5일 운동에 뜨거운 물을 펑펑 써도 월 6만 원이었던 곳, 동네 주민센터 수영장에 등록하기로 했다.
새벽 여섯 시 삼십 분에 일어나 사람이 거의 없는 거리를 지나 컴컴한 계단을 내려갔는데 와, 그곳에는 처음 보는 활기가 있다. 싸한 락스냄새. 수증
기로 뿌예진 창.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물을 튀기는 사람들. 쭈뼛쭈뼛 수영복을 갈아입고 초급반 레인에 발을 담갔을 때, 코치가 다가와서 물어봤다. “혹시 선출이세요?” 커 보이는 게 싫어 늘 구부정하게 다녔던 넓은 어깨와 어색하게 긴 팔이 수영에 아주 최적화된 몸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수영은 큰 허우대와 실용적인 마음에 맞춘 듯이 꼭 맞았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생활체육이라는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제껏 몸을 움직이는 것에는 늘 목표가 있었다. 여기서 저기로 가기 위해 발을 움직이고, 청소를 하기
위해 허리를 굽힌다. 움직이는 몸 자체에 대해 생각해본 건 처음이었다. 물속에는 내가 평생 몰랐던 감각이 있었다. 물속에서 몸을 웅크릴 때의 안정감. 물을 가를 때의 속도감. 헐떡거리다가 갑자기 숨이 트이며 몸의 리듬을 타는 순간의 평온함. 이런 걸 모르고 살 뻔했다니! 저녁형 인간으로 살았던 나는 매일 수영을 가며 완전 새벽형 인간으로 바뀌었다. 수영책을 사보고, 한 박자 늦은 자막의 일본 수영 유튜브로 자세를 연습하고, 수영에 관련된 온갖 굿즈를 사 모으고, 채광이 좋다는 수영장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다시 상급반으로 올라가며 조금 더 섬세하게 내 동작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흠 물은 잘 타는데 뭔가 스트로크에 박력이 없는 것 같고. 그래. 근력을 올려야겠어. 이렇게 삼 년여간의 수영으로 어엿한 생활체육인이 된 나는 두 가지 운동을 병행하게 된다.
2010년대 중반쯤, 출근하는 직장인들로 가득한 을지로 빌딩 숲에서 느닷없이 헉헉거리며 달리기를 하고 있는 한 무리를 보았다면 그중에 한 명이 나다.
빌딩의 지하로 내려가면 웃통을 벗은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바벨을 던지고 있다.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이 한국에 소개되고 체육관들이 하나씩 생겨날 때였다. 뭐 지구력과 근력을 동시에 폭발적으로 기를 수 있다고? 내가 원하던 게 다 있잖아! 제대로 낚인 나는 당시 상당히 거금이었던 돈을 내고 새로운 운동을 등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또… 크로스핏이라는 세계에 급격히 빠져들게 되었다.
이 바벨 하나를 들어 올리는데 이렇게 많은 동작이 필요하다고? 바벨을 들어 올리는 게 아니라 바벨과 땅 사이에 몸을 끼워넣는거라고? 와 내가 이걸 또 모르고 살 뻔했네? 매일 일정한 시간에 클래스 수업으로 진행하다 보니 같은 반 사람과도 금방 친해졌다. 그 사람들은 모두 크로스핏에 반쯤 미쳐있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술을 먹으면서도 바벨과 케틀벨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고, 술에 취하면 팔굽혀펴기를 했다. 그냥 스쳐지나갈 수도 있었던 빌딩 지하에 이런 세계가 있었다니! 운동을 같이 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친해질 수 있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크로스핏에 돌아있다니! 하지만 급히 빠져든 만큼 일 년쯤 지나 급히 빠져나오게 된다. 평생을 책상물림으로 살아온 연약한 나의 허리가 견디기에는 너무 과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다양한 체육관을 전전하게 되었다. 케틀벨과 크라브마가, 클라이밍의 세계를 살짝씩 맛보고 나는 또 다른 생활체육의 세계에 본격 입문하게 된다.
테니스가 지금까지 해왔던 생활체육과 가장 다른 점은 승부가 있다는 점이다. 내가 치는 공 하나하나에 이기고 지고가 있다. 이제껏 해오던 운동은 승부가 없었다. 그저 나 혼자 착실히 하면 되는 것이 애살 없는 스타일인 나에게 아주 딱 맞았고, 남보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뭐 수영이야 내 속도로 내 스타일로 가면 그만이고, 크로스핏이나 케틀벨이나 나에게 주어진 양을 해내면 그만이니.
테니스도 비슷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나는 아주 별로인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난 지는 걸 싫어하는 아주 옹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못 쳐서 진 게임에도 계속 핑계를 찾는다. 아니 내가 요새 일이 너무 바빠서. 오늘 스트링을 바꿔서. 쟤가 공이 너무 짧아서. 정말 못난 마음이다. 아니 이렇게 못났게 생각하지 않으려면 내가 테니스를 잘 치면 되잖아? 그런데 이게 또 구기 운동이라 지독하게 안는다. 아니 애초에 재능이 없는 것 같다. 그럼 또 핑계를 찾고, 내가 추구하는 쿨한 모습과 너무 다른 내가 미워지고, 자꾸 테니스도 미워지고, 다 때려치울 거라고 하다가 또 새벽에 일어나서 레슨을 가고, 티비보다 벌떡 일어나서 라켓을 휘두르고. 그러다가 깨달았다. 아, 이게 애살이라는 거구나! 애살은 그저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아니었다.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점점 못나지는 내 모습. 그걸 다 인정하고도 못난 나를 피해 도망치지 않는 마음. 아 남들은 이런 걸 다 참 일찍 겪었구나.
나는 평생 승부욕이 없는 삶을 살아왔고, 어떨 때는 그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내가 잘하지 않는 것은 아
예 하지 않는 식으로, 나의 재능 없음과 옹졸한 승부욕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애살 없이 허허실실 살아왔는데, 이 생활체육이라는 세계는 그걸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다.
어두컴컴한 지하 수영장에, 흔히 보이는 체육관에, 운동장 한편에 희로애락이 있다. 그저 날아오는 공
을 치고, 물속을 왕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들어가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거대한 세계다. 아직도 내가 열지 않은 수많은 생활체육의 세계를 생각하면 아주 설렌다. 저기 보이는 지하 탁구장에도, 기합 소리 새어나오는 에어로빅장에도, 게이트볼 운동장에도, 그들만이 아는 기쁨과 슬픔, 발견이 있겠지. 엄마가 키워준 큰 허우대와 성실한 마음을 앞세워 하나하나 방문해 볼 생각이다. 드디어 알게된 애살과 함께, 옹졸한 마음을 도망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