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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스키 Feb 17. 2024

꺼질듯이 깜빡이는 시그널을 찾아서, <하트 시그널>

하트시그널 시즌4를 보는 중간에 적었던 글입니다.

  개인적인 일로 정신이 없는 몇 주를 보냈다. 퇴근 후 집에 누워서도 머릿속이 계속 복잡했다.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보기에는 기력이 떨어져, 하트시그널 시즌4를 틀었다.


  연애 프로그램, 소위 ‘연프’는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합숙 방식에 따라 두 스타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비교적 짧은 시간, 5일에서 1주가량 휴가를 내고 온 출연진들을 합숙시키는 스타일이다. 이들은 아침 먹고 데이트 점심 먹고 데이트 저녁 먹고 데이트 밤에도 데이트를 하며 아주 사랑 찾기에만 올인 한다. <나는 솔로>, <솔로 지옥>, <러브캐쳐>, <투핫> 등 국내외 많은 프로그램이 이런 식이다.

  또 다른 스타일의 프로그램들에서는 비교적 장기간 합숙을 하며 일상생활도 함께 유지한다. 출연자들은 숙소에서 출퇴근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며, 퇴근 후나 주말에 데이트를 한다. 작년 최고 히트작<환승연애>와 오늘 이야기하려는 <하트 시그널>, 일본의 명작 연프 <테라스 하우스>가 이런 식이다.


  자극적인 마라 맛 장면은 당연히 전자에서 나온다. (환승연애는 포맷 자체가 마라 맛 이니까 논외로 한다) 사람들을 가둬놓고 연애만 하라고 했을 때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볼 수 있어 연프라기 보다는 거의 관찰 다큐멘터리에 가까워진다. 후자는 상대적으로 잔잔하고 미묘한 편이지만, 긴 기간 촬영을 하는 만큼 서사가 생긴다. 전자의 프로그램들이 화장실 가는 것만 빼고 출연자의 24시간을 담고 있다면, (가끔 화장실 가는 것도 나온다) 후자의 프로그램에서는 출연자들의 삶이 뭉텅이로 생략된다. 그들이 평일 낮에 무슨 일을 하고 누구와 어떤 대화를 하는지 시청자들은 알 수 없다. 그래서 출연자들의 감정은 가끔 널을 뛰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천천히 어딘가를 향해가는 감정의 흐름을 느린 호흡으로 보는 맛이 있다.


  이런 서사 구조를 가장 잘 만든 연프는 뭐니 뭐니 해도 <테라스 하우스>다. 2012년 처음 방영된 일본 프로그램이며, 다섯 개의 시즌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직업도 성격도 외양도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오고, 카메라는 그 모두의 이야기와 감정선을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훑는다. 데이트 프로그램이지만 산만한 자막도 출연자별 인터뷰도 없어, 마치 잔잔한 일본 영화 같다. 물론 msg잔뜩 쳐주는 패널들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출연자들의 감정을 넘겨짚거나 몰아가는 편집은 없다. 물론 주인공 역이 있고, 빌런도 등장한다. 하지만 그 어떤 캐릭터도 소모적으로 소비되지는 않는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장점은 그들을 그저 납작한 캐릭터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을성 있는 진행과 애정 어린 편집으로 이 쇼의 모든 출연진은 캐릭터가 아닌 인간으로 느껴진다. 인간은 입체적이고 복잡한 존재고, 감정도 마찬가지라는 단순한 사실을 이 쇼를 보며 다시 깨닫게 된다.


  <하트 시그널>은 누가 봐도 이 쇼가 생각나는 프로그램이다. 8명의 남녀가 한집에 살며 본인들의 일상을 꾸려간다. 패널들은 그들 사이에 흐르는 시그널을 보고 한 회가 끝날 때마다 각각의 마음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맞혀야 한다.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이루어진 출연자들은 열심히 자기 삶을 살고 있는 열일러다. 그들이만날 수 있는 시간은 출근 전, 퇴근 후, 주말이 전부다. 시간이 갈수록 출연자들의 낯빛은 점점 흐려지고 살은 쭉쭉 빠진다. 당연하다. 회사 다녀오면 눕기 바쁜 게 현대인의 일상인데 여기서는 아침저녁으로 카메라는 돌아가지, 제작진들이 짜준 데이트도 해야지, 저녁에 모여서 술도 마셔야지, 과로도 이런 과로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지독한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것 같은 얼굴들의 감정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 혼란스러워진다.


  지금 이 쇼의 주인공 역은 민규와 지영이다. 남자 네 명 중 민규를 제외한 세 명은 대놓고 지영을 좋아한다. 지영은 민규에게만 호감이 있다. 민규의 마음은 도무지 알 수 없다. 쇼의 초반에는 비교적 마음의 방향이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중후반으로 갈수록 패널들은 출연자의 마음 읽기에 실패한다. 속마음 인터뷰가 없는 이 쇼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이들이 시선이 향하는 곳과 오가는 대화 속 묻어있는 미묘한 시그널이다.


  처음 시작했으니 관성으로 보고는 있지만, 이번 하트 시그널은 좀 재미가 없다. 필터를 과하게 먹인 예쁜 화면과 예쁜 출연자 사이에서는 감정마저 필터를 먹인 듯 정제되어 있고 희미하다. 한 마디로, 이들 사이에선 그 어떤 욕망도 찾아볼 수 없다. 진짜로 욕망이 없든 프로그램의 목적에 맞게 의도적으로 삭제를 했든, 초식동물 같은 이들이 보내는 시그널은 너무 조심스러워 꺼지기 일보직전이다.

  이런 미묘한 시그널로 쇼를 이끌어가려면 인간적인 매력으로라도 설득을 해야 하는데 이 프로그램의 역량은 그 정도는 아니다. 이것이 <테라스 하우스>와 갈리는 지점이다. <테라스 하우스>는 각 등장인물의 캐릭터 구축에 아주 신경을 쓴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어떤 감정을 중요시하며 어떤 성장을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카메라를 통해 알게 된다. 하트 시그널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는다. 관계성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개인을 보여주는 것에 실패한다. 우리는 장장 11화에 거쳐 20시간을 투자해 그들의 삶을 지켜봤지만, 민규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른다. 그래서 민규의 방황하는 마음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출연진들이 사랑에 덜 미쳐 보인다고 비난을 할 수는 없다. 이미 개개인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그들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안타까운 마음은 있지만 그래도 중도하차를 하지 않고 계속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자극적인 데이트 쇼는 너무나도 많고, 사실 이렇게 잔잔한 쇼를 찾기도 힘드니까.

  하나 다시 깨닫게 된 것은, 사랑과 욕망은 피곤함을 이기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누군가와 손 닿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조금 더 소중하게 생각하자. 피곤한 현대인에게 사랑은 쉽게 찾아오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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