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로진 Oct 16. 2015

인문정신의 승리, 《논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9 to 6 직장인을 위한 고전 읽기 01     

  

인문정신의 승리, 《논어》

_ 신이 되길 거부한 성인의 어록   

 

《더 보이 넥스트 도어》(The boy next door)라는 영화에서 한 남자가 주인공 클레어에게 묻는다. 

“고전을 가르친다고요?”

“네.”

“고전에서 배운 걸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써먹겠어요? 교육도 좋지만 아이들은 일을 해야 해요. 실질적인 것-돈을 벌 수 있는 지식 말입니다.”

클레어가 일어서면서 대답한다.

“J. K. 롤링!”

“뭐라고요?”

“억만장자요. 고전을 전공했죠.”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니다. 이건 고전이 주는 많은 이익 중에 하나일 뿐이다. 고전이 주는 가장 큰 이익은 아마도 ‘순수한 읽기의 즐거움’일 거다. 우리는 직접적인 감상이 주는 향유의 즐거움을 잊은 지 오래다. 공을 손에 쥐고 던지기보다는 TV로 야구를 보고, 나아가 모바일 야구 게임을 즐긴다. 망치를 두드리고 대패질을 하기보다는 홈쇼핑으로 가구를 산다. 종이로 된 책을 읽기보다는 발췌하거나 편집해 놓은 스마트폰 위의 단편적 지식들을 흡수할 뿐이다.  

 하루 종일 모니터와 씨름하는 직장인이라면 더욱더 고전을 읽어야 한다. 고전 속에는 인간이 있고 모험이 있고 사색이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일과 사람에 부대끼고 나면 우리의 이성은 마비되고 감성은 증발해버린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심장은 두근거린다. 내일 또 하루를 이렇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이럴 때, 고전을 펼쳐보라. 단 6초 만에 당신은 소크라테스와 대화할 수 있고 오디세우스와 모험을 떠날 수 있으며 공자와 농담을 나눌 수 있다. 힘겹고 헐벗은 우리의 영혼은 인류의 지성과 현자, 성인들이 건네는 손을 잡는 순간 회생한다. 책을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전문가들이 해석하거나 설명한 그대로 읽지 말고 한 번 삐딱하게 읽어보자. 가뜩이나 ‘고전’이라고 하면 왠지 외워야 할 것 같고, 여기서 어떤 크나큰 교훈을 얻어야 할 것 같은 압박 아닌 압박이 드는데 ‘선생님’들이 풀어쓴 딱딱한 책을 각 잡고 읽으면 또 하나의 시험공부가 될 뿐이다. 물론 선생님들의 풀이를 무시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일단 머리에서 힘을 빼고 내 식대로 먼저 느껴보고 읽어보자는 말이다. 이런 걸 지적 유희라고 부르던가?


당나라 시대 그려진 공자 초상화 @위키피디아

《논어》를 펼쳐 보자.     


공자 선생님은 사실 신의 아들이시다.

천지를 창조한 반고는 여와*에게서 삼황오제**를 얻었는데

삼황오제의 마지막 황제인 순 임금은 공자 선생님의 조상이다.

 (*반고, 여와= 중국 신화 속에 나오는 창조주. 반고는 천지를, 여와는 인간을 만들었다. **삼황오제= 중국 고대 전설 속의 지도자들) 


 뭔가 이상하다고? 그렇다. 이건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 아니다. 필자가 지어서 써본 것이다. 왜 공자(BC 551~BC 479)의 제자들은 《논어》의 첫 문장을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궁금해서 한번 써봤다. 공자님은 예수, 무함마드, 부처와 함께 4대 성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분이다. 불교, 기독교처럼 ‘유교’라고 부르지 않는가?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 선생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온갖 기적을 행했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썼다. 《신약 선경》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생명의 말씀사, 개역개정, 2013)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거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에서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다. 아브라함의 선조는 노아의 아들 ‘셈’이고 노아의 선조는 ‘셋’(Seth)이다. 셋은 바로 아담과 하와의 셋째아들이다. 첫째아들 카인이 둘째아들 아벨을 죽이고 떠난 뒤에 얻은 아들이 셋이다. 결국 예수의 선조는 아담인데 아담은 창조주가 만들었으므로 예수가 아담의 직계 후손 즉, 신의 아들이 맞게 되는 거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족보 다음 내용은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다. 그럼 결국 예수는 요셉의 아들도 아닌 셈이데 도대체 족보는 왜 강조한 거지? 흠.

 이렇듯 성경에는 비과학적이고 모순투성이의 스토리가 차고 넘친다.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다. 사람이란 참 이상한 동물인 게 어지간한 비논리에는 이의를 제기하지만 어마어마한 허구에는 감히 질문조차 하지 못한다. 의문을 제기하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는 답을 준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꾸란)의 첫 구절은 이렇다.    


참으로 자비롭고 자애로운 알라의 이름으로

찬양합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알라께.

참으로 자비롭고 자애로운 분,

심판 날의 주재자여.

우리가 섬기고 구원을 청할 분은 오직 당신 뿐

저희를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은혜를 내린 자들에게 허락한 길로. 

당신을 노엽게 한 자들이나

헤매는 자가 걷지 않는 그런 곳으로.

(Saheeh International, <The Quran>, Abul-Qasim Publisig House 1997, 1p)    


 이 첫 구절에만 봐도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드러난다. 신 앞에서 왠지 좀 비굴한 신자의 모습이 보일 정도다. 알라는 곧 신이며 하나님이다. ‘온 세상의 주인이고, 심판의 날을 주재’한다. 믿고 구원을 청할 오직 하나의 존재=알라라는 등식이다. 이슬람에서 예배 시각을 알리기 위해 육성으로 외치는 일을 ‘아잔’(Azan)이라 하는데 이 내용 첫 부분은 “알라는 위대하다. 나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고 증언한다. 나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도임을 증언한다.”다. 유일신에 대한 확신과 무함마드에 대한 신뢰를 고백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인문학, 인문학, 하는데 그 속에 들어 있는 ‘인문정신’의 핵심이 뭘까? 의문을 제기하는 것, 모든 사람들이 “예스”라고 해도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뒤집어 생각해보는 것 아닐까? 무조건 믿어라. 까라면 까라. 닥치고 십일조… 뭐 이렇게 되면 아주, 매우, 심히 곤란해지는 거다.

 다시 공자 이야기로 돌아가서, 진짜 《논어》의 시작은 어떤지 보자.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먼 데서 친구가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닌가?    


 정말 심하게 초라하지 않은가?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계보를 읊고, 이슬람은 오직 하나뿐인 신을 찬양하고 있는데 지금 ‘배우고 익히면 기쁘고… 친구가 찾아오면 좋고…’ 이런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도대체 누가 공자를 예수, 무함마드, 부처와 더불어 인류 역사상 4대 성인이라고 했는가? 

 문제는 이것이 2,500년 전에 있었던 일을 기록했다는 거다. 이것 하나만으로 《논어》는 위대한 인문정신의 승리다. 《논어》와 공자의 언행을 실었다는 《공자가어》(孔子家語)를 아무리 뒤져봐도 공자가 신에 대해 언급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공자의 제자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선생님께서는 다음 4가지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 

괴상한 것, 폭력적인 것, 문란한 것, 신에 대한 것. 

《논어》 ‘술이’편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는 공자 사당@위키피디아

 공자는 귀신, 신비한 주술,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선 “No comment”한다.  그만큼 인간적이었고 이성적이었고 현실적이었다. 더불어 감성적이고 감각적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공자는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지, 신의 아들이나 사도가 아니었고 종교의 교주는 더더욱 아니었다.

 2,500년 전 공자의 제자들은 왜 공자를 신적인 존재로 기록해놓지 않았을까? 그건 바로 공자 스스로가 자신을 철저히 ‘인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학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문학적 인물이었다. 설사 제자들이 선생님의 공적을 기적으로 바꾸어 기록하려 해도 공자가 나서서 말렸을 거다.

 만약 공자가 인간의 약한 면을 간파하고, 인간의 모순과 어리석음을 이용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유교는 거대한 세력을 가진 종교로 자리 잡았을지 모르고, 공자는 우리가 아는 공자가 아닌, 거대 종교 창시자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내가 공자의 제자였다면 선생님의 이름을 팔아 크게 한 탕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아직도 공자의《논어》가 21세기와 맞지 않는 구시대의 산물처럼 생각되는가? 우리는 잘못 알고 있다. 공자는 그 반대였다. ‘신’이 지배하던 고대에 신이 되길 거부하며 나타난 가장 진보적인 사상가였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다시 《논어》 읽어보자.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논어》가 당신 앞에 펼쳐질 것이다. 
  경건한 자세로 무릎 꿇고 고전을 읽지 말자. 덮어놓고 고전을 받아들이지 말자.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조금은 엉뚱하게 나만의 시각으로 인문 고전을 읽는 재미를 느껴보자. 이 재미에 빠지면... 에휴, 약도 없다.    


-관련 책, <짧고 굵은 고전읽기> (비즈니스 북스) http://durl.kr/abp87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